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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38호(2012.06)

[생활기획공간 통]고단한 '좋아요', 선택지 없는 '싫어요'

 [생활기획공간 통]고단한 '좋아요', 선택지 없는 '싫어요'

글 : 박진명 motwj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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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코너는 <생활기획공간 통>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통으로 찾아오시면 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습니다.

 

고단한 좋아요, 선택지 없는 싫어요


좋아요의 고단함

 

  침묵은 금이 아니라 침묵은 수긍이고 인내다. 회사에서 과장의 터무니없는 농담에 침묵하는 것이 그렇고, 숙제를 빙자한 교수의 자료수집 대행이나 아이디어 도용 앞에서 침묵하는 것이 그렇고, 언론을 꽉 틀어진 정권의 실정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그러하다. 워낙이 그런 사회라서 더 이상 ‘좋아요’는 좋아죽겠다는 마음의 표현이 아니다. 그저 싫지 않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를 상대에게 알리려는 예의일 뿐. 그걸로 안 되겠다 싶은 사람들은 ‘아’라고 말하기 전에 배꼽 잡을 준비를 하고, ‘어’라고 하기 전에 구두를 갖다 바침으로써 ‘좋아요’ 정도로 전달 안 되는 표현을 몸소 행동에 옮긴다.
  상황이 이러니 싫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째 표현해볼 선택지가 적다. 돌려 말하나, 직설적으로 말하나, 표정으로 드러나나, 말과 글로 전달하나 싫다는 감정이 드러나고, 혹은 그 비슷한 뉘앙스만 풍겨도 적/아의 논리가 나오고, 공/사가 나오고, 위/아래의 잣대가 꼬치처럼 내 삶을 쑥 꿰어버린다. 편두통에 인상이라도 쓰고 있었다가는 예의도 없고, 공/사도 모르는 눈치 없는 놈으로 전락하고 만다.
  감정의 방향이 한쪽으로 치우친 사회에서 ‘좋아요’는 고단하고 고단하다. 해도 별 티가 나지 않을 뿐 아니라, 마음을 다해 ‘좋아요’ 할 수 있는 경우가 점점 줄어든다. 마음과 달리 ‘좋아요’를 하든, 침묵으로 싫지 않은 티를 내기 위해 애를 쓰든, 자연스런 감정의 유로가 막혀버린 곳에서 ‘좋아요’는 다크 서클 작렬이다.

 

좋아요, 고인 물

  부산대 굿 플러스 건축 관련 비리, 땡중들의 도박, 대통령 측근 비리와 민간인 사찰, 고리원전의 부품 비리, 통합진보당의 문제까지 요즘 눈만 뜨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그런 일들이 펼쳐지는 것도 한 쪽의 표현이 막혀버린 소통의 구조 탓일 게다. ‘싫어요’를 거세해 버린 세계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되려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곪아 터져서 문제가 불거져 나오기 전까지 조직 내에는 ‘좋아요’ 하거나, 싫은 티 나지 않게 완벽하게 소화함으로써 일신의 안위를 지켜 내거나, 나아가 몸소 ‘아’ 하기 전에 배꼽을 잡은 사람들로 가득했을 테다. ‘좋아요’가 쌓여서 병목현상이 되다가 꽉 막혀버린 것인데 ‘싫어요’로 나갈 구멍이 없으니까 요래 뻥하고 터지는 거다.
  이런 것을 두고 썩었다고 한다. 이때 썩었다고 하는 것은 한 인간의 됨됨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한 사회의 자정능력이 상실된 것을 말한다. 노골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그 구성원들의 합의가 바로 고인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환경만 만들어지면 한 인간의 부도덕성이 조직 전체를 썩게 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좋아요, 싫어요

  부산대 축제에 가보니 커다란 미끄럼틀을 갖다 놓았는데, 대학생들보고 동심으로 돌아가라고 한 건지는 몰라도 외국인유학생과 그 자녀가 함께 타고 논다. 그렇게 외국인 가족의 즐거운 한때가 대학축제와 연결될 때.
  쥐뿔도 없는 장전동 문화단체들이 모여서 매월 반상회를 한다(장전커넥션). 뭐 같이 할 수 있는 게 없는지, 최근에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아직 잘 살아 있는지 확인하다가 지역의 축제를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없을까 하고 ‘청춘을 누가 막걸리’를 만들었다. 개성 충만한 이 양반들이 찌지고 볶고 하면서도 발랄한 재치를 모아낼 때.
  이 양반들이 “예술가 이모삼촌 만들기”라는 청소년 프로그램에 참여해 선생이 아니라 이웃인 예술가가 되어 아이들의 문화예술교육을 함께 고민할 때. 그렇게 함께 어울리면서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표정을 볼 때.
  아마추어들의 장점 극대화라는 새로운 수다의 탄생을 선언한 “아마추어 개념미디어 바싹”이 3호 발간을 버텨냈을 뿐 아니라 점점 많은 아마추어가 모여들고 있다는 사실. 기사 하나를 위해 한 달에 네 번 꼬박꼬박 회의에 빠지지도 않는 아마추어들의 즐거움과 마주할 때.

 

  가슴이 헛, 하고 막히는 세상의 뉴스들을 잊어보려고 진짜 ‘좋아요’ 할 만한 일을 떠올려본다. 고여 썩은 일들은 동시다발적이고 거시적인데, 내가 정말 ‘좋아요’ 할 만한 일들은 미시적이고 간헐적이다. 작은 것들은 언제나 움직이고 새로운 자극이 더해지는데, 덩치가 큰 것들은 덩치 자체에 주목하느라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새 자극이 없다. ‘싫어요’를 차단하는 덩치들은 댓글을 삭제하고, 후배들의 비판을 묵살하면서 철옹성을 쌓으려 한다. 그러나 그 철옹성은 외부의 건전한 비판을 막으면서 내부의 풍부한 대지와 그 가능성을 좁혀갈 뿐이다. 그리고 나와 당신들의 고단해진 ‘좋아요’가 어떻게든 한몫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들의 ‘좋아요’는 어째 ‘좋아요’ ‘좋아요’ 잘하고 계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