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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읽기 사람읽기>
온몸으로 산을 오른다는 것
글 : 윤지영(동의대 국문학과 교수) windnamu@hanmail.net
일러스트 : 방정아 artbang@hanmail.net
매일 아침 택시와 승용차와 버스가 한데 엉켜 북새통을 이루는 학교 앞 도로를 지날 때마다 지하철역에서부터 걸어 다니면 될 텐데, 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웬걸, 나부터도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지하철역에서 정문까지 약 1km, 정문에서 학교의 가장 안쪽에 있는 건물까지 또 1km나 되는데다가 대한민국의 다른 많은 학교들처럼 내가 몸담고 있는 동의대학교 역시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경사도 만만치 않다. 환경을 생각하든, 건강을 생각하든 걸어 다니면 좋다는 걸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아침부터 그 길고도 가파른 산길을 땀 뻘뻘 흘리며 걸어 올라갈 생각을 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셔틀 버스도 없고 자가용도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학생이고 교직원이고 다들 걸어 다녔다고 하는데, 이제는 누구도 감히 그 길을 걸어 오르려 하지 않는다. 학교 뒷산을 찾는 인근 주민들 말고는 말이다. 이른 아침이면 가벼운 등산복을 입은 아줌마, 아저씨들이 힘겹게 산을 오르는 차량의 행렬을 옆에 끼고 교정을 걸어 오른다. 그들의 목적지는 우리 학교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효민 야구장 뒤편에서 이어지는 엄광산이다.
방학이 되니 교정이 한가롭다. 방학이지만 나는 여전히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학생도 차도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기어를 2단에 놓고 속도를 낸다. 채 달궈지지 않은 햇살과 엄광산의 나무꼭대기를 맴돌다 내려오는 바람이 활짝 열어 놓은 차창 사이로 쏟아져 들어온다.
교문을 막 지난 지점에서 한 초로의 남자가 걸어가는 게 눈에 들어온다. 걷는 모습이 여느 등산객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내 차는 순식간에 그를 스쳐지나간다. 오른 손을 옆구리에 붙이고 오른 다리를 끌며 걷는 걸 보니 오른 쪽에 마비가 온 모양이다.
이튿날도 그를 스쳐 지나간다. 전날보다는 30m 쯤 더 전진해 있는 지점이다. 전날보다 15분가량 늦은 시각이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7시 반에서 8시 반 사이 내 차는 교정 어딘가에서 어김없이 그를 스쳐 지나간다. 차로 3분도 채 안 걸려 올라가는 이 경사로를 그는 최소한 한 시간에 걸쳐 걸어 올라간다는 뜻이다. 집에서 출발한 시각에 따라 그를 지나치는 지점은 달라진다. 10분가량 일찍 출발한 날에는 교문을 막 지나친 지점에서, 30분가량 늦게 출발한 날에는 그보다 위에 있는 자연대 로타리쯤에서 그를 지나친다.
그를 지나치는 지점은 매번 다르지만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든 그의 걸음걸이는 언제나 매우 힘겨워 보인다.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다.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가 내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반 발짝 뒷걸음질 치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다. 아니, 경사로를 오르는 것이니 한 걸음 올라갔다가 반걸음쯤 미끄러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까.
나는 그가 어디서부터 걷기 시작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출발을 볼 만큼 학교에 일찍 도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면 지하철역에서부터 그 등산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학교 정문 바로 아래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또한 그가 어디까지 오르는지도 알지 못한다. 학교 뒷길로 해서 엄광산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지, 아니면 그 길로 산을 넘어 반대편 마을로 내려가는지, 그것도 아니면 셔틀버스의 회차 지점까지만 갔다가 내려가는 건지 알 수 없다. 나는 그가 어느 지점에 있든 그를 앞지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그의 목표가 산 정상이라고 생각해 본다. 남들 보폭의 1/3쯤 되는 걸음걸이로 남들이 1시간이면 오를 정상을 그는 한 나절이 지나서야 도달한다. 그는 정상에서 그다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저 멀리 은빛으로 빛나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물 한 모금을 마실 뿐이다. 그리고 이내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올 때보다 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더 작은 보폭으로 더 오랜 시간이 걸려 산을 내려온다. 그의 얼굴로 이미 저녁 해가 지고 있다. 그의 하루는 이처럼 대단치도 않은 동네 뒷산을 올랐다가 내려가면 끝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건강의 회복을 목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겠지만 그것은 이루어지면 감사한 희망이다.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아무 것도 안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 힘겨운 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경건한 마음이 든다. 온몸으로 온몸을 밀어 마침내 만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했던 김수영도 떠오른다. 그리도 그것이 우리 삶에 대한 메타포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등산이 그렇듯, 우리의 삶은 그저 제자리에 머물 수 없다는 그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지도 모른다.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앞에 놓인 산을 온몸으로 힘겹게 밀고 오르는 길, 곧 생에 대한 사랑을 만나러 가는 길이 바로 삶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