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소설]일본에서도 늠름한 이병욱 씨 친구를 보라
배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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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일본. 여기는 일본 야마구치 현의 야나이 시.
아, 이병욱 씨와 김철수 씨가 바야흐로 국제적으로 놀기 시작했습니다. 현지에 파견 가 있는 선배의 초대로 큰 마음먹고 9박10일의 해외여행을 떠나 온 것입니다. 둘은 현재 한국에서도 가보지 못했던 회전 초밥 집에 앉아 점심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병욱 씨의 표정이 상당히 좋지 않습니다. 김철수 씨가 직원에게 뭐라고 할 때 마다 이병욱 씨는 “야, 하지마라. 야, 쫌!”하며 얼굴이 벌게져서 어찌 할 바 모릅니다. 휴대폰을 꺼내 번역기 앱을 열심히 두드리지만 인터넷이 안 되니 무용지물입니다. 그 와중에도 김철수 씨는 당당히 한국어를 전파합니다.
“아, 그라이까 국물, 여기는 국물 안 주는교? 국물.”
“아아, 스미마셍, 구그무르?”
“국물, 아, 뭐라 해야 되노? 아, 그래. 우동. 우동 국물!”
일본인 직원은 난감한 표정을 짓다“우동데쓰까?”하더니 고개를 젓고 “코코 우동와 아리마셍.”합니다. 눈치 빠른 이병욱 씨가 얼른 알아듣고 김철수 씨를 말립니다.
“야, 여기 우동없단다. 그만 좀 해라.”
“누가 우동 먹고 싶다나? 그냥 주는 국물, 국물 말이다. 초밥 집에 무슨 국물을 안 주노?”
그러더니 말릴 새도 없이 돌아서는 직원을 잡고 다시 따집니다.
“그라이까…, 아 맞다. 저기 적혀 있네. 탕(湯)! 탕 없는교? 저기 저 탕, 탕! 탕 모르요?”
아아, 김철수 씨의 탕탕탕 소리에 이병욱 씨는 그만 총 맞듯이 쓰러지고 맙니다. 초밥집을 나오자마자 이병욱 씨와 김철수 씨는 대판 싸우기 시작합니다.
“니는 쪽팔리구로 그기 뭐하는 기고?”
“뭐 어때서? 여행 와서 잘 모르니까 물을 수도 있는 기지. 니는 꼭 사람들 눈치보고 그라더라?”
“좀 준비해서 딱 맞게 물어보면 쓸데없이 주목 안 받고 얼마나 좋노?”
“마아이 준비해라. 되도 안한 번역기 들고. 마! 그거 쌔리 지았뿌라. 급할 때 되도 안 하드만….”
“뭐어? 니 말 다했나? 이런 썅노무…!”
여기는 일본. 여기는 일본 야마구치 현 야나이 시. 한국의 욕이 두 사람을 통해 널리널리 전파됩니다.
선배의 하숙집 주인이 소개한 민숙(民宿)에서 두 사람은 짐을 풀었습니다. 상당히 삐친 상태지만 선배 앞에서는 상당히 친한 척 하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민숙 첫날밤. 둘째날밤. 셋째날밤….
“어허헉!”
이병욱 씨와 김철수 씨가 새벽 4시에 깬 건 동시에 일어난 일입니다.
“와아, 미치겠네! 콜록콜록! 야아들은 도대체 이래가 우째 사노?”
“진짜 죽으뿌겠다. 이봐라, 수건 물에 적셔 놓은 거 빠짝 말라있다. 이거 봐라.”
바야흐로 일본 전통의 다다미 방과 온풍기의 습격입니다. 수건뿐만 아니라 코와 목이 완전히 타클라마칸 사막입니다. 두 사람은 오아시스를 찾듯 냉장고를 열어 물을 벌컥벌컥 마십니다. 시간은 새벽 4시 반. 김철수 씨는 다시 코를 골지만 이병욱 씨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내일 아침에 민숙 아줌마한테 말할 기다. 가습기라도 내놔라고. 와아, 진짜!”
이병욱 씨의 귓가에 김철수 씨의 말이 계속해서 울려 퍼집니다. 이건 뭐, 정말 공포입니다.
‘하필이면 선배가 출장 갔을 때 이러냐? 이거 어떡하지?’
한참동안 끙끙대며 생각을 정리하던 이병욱 씨는 마침내 결단을 내립니다.
‘그래, 편지를 쓰자. 놈이 일어나기 전에 편지를 써서 민숙 아줌마한테 불편함을 전달하는 거다. 다행히 민숙은 무선 인터넷이 된다. 어떻게든 놈이 못 설치게 하자. 나 혼자 해결하는 거다! 나 혼자서!’
이병욱 씨는 점점 진지해집니다. 저 옛날 시라소니 선생님이 혼자서 만주벌판을 평정하신 것처럼, 그는 독고다이 정신을 발휘합니다. 눈이 따갑고 목이 칼칼하지만 그는 열심히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지금 2층에 묵고 있는 한국인 이병욱입니다…, 다다미 문화에 익숙지 않아 그런지 밤에 너무 건조합니다. 혹시 가습기가 있다면…”
히라가나, 가타카나는 잘 몰라도 한자(漢字) 하나하나를 확인하는 이병욱 씨. 그의 노고에 박수를 보냅니다.
드디어 아침이 되었습니다. 아침을 먹자마자 다시 코를 고는 김철수 씨를 두고 이병욱 씨는 비장한 발걸음을 옮깁니다. 마침 소파에 아주머니가 앉아 계십니다. “스미마셍.”하고 예의를 차린 뒤 공손히 휴대폰에 적힌 편지를 보여드립니다. 안경을 뺐다 썼다 하시며 열심히 읽으시는 아주머니. 순간 아주머니가 “소오데쓰, 아노…, 조또마떼 구다사이.”하며 벌떡 일어나 전화를 거십니다.
“하이, 아카이시 상? 고레와….”
헉! 아카이시 상은 선배 하숙집 주인 이름입니다. 아주머니는 한참 메모를 하시더니 다시 전화를 거십니다. 전화를 하실 필요까지 없다며 말해야 하지만 입도 손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리상? 아노….”
허걱! 이번엔 선배의 이름이 튀어나옵니다. 일이 점점 커져갑니다. 아주머니는 통화가 끝나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병욱 씨를 바라봅니다.
“아…, 그러니까 건조, 그러니까, 다다미, 건조, 어…, 가습기, 가습기가 왜 번역이 안 되노?”
“와? 가습기 없다나?”
등 뒤에서 갑자기 들리는 김철수 씨의 목소리에 이병욱 씨가 화들짝 놀랍니다. 너무 놀라서 휴대폰을 떨어뜨릴 정도입니다. 이병욱 씨가 휴대폰을 줍다가 김철수 씨의 한마디에 경악합니다.
“그라믄 우짜겠노? 바께스에 물이라도 받아놔야지. 스미마셍, 바께쓰, 바께쓰데쓰.”
“아아! 바께쓰데쓰까?”
아주머니의 표정이 밝아지며 부엌에서 얼른 양동이를 들고 오십니다.
“물, 미주(물) 콸콸!”
“아, 아! 소데쓰네?”
아주머니는 물까지 받아주시며 환하게 웃습니다. 아아, 바께쓰, 바께쓰…. 멍한 이병욱 씨의 얼굴에 대고 김철수 씨가 한마디 합니다.
“이런 데까지 와가 혼자 지랄이고…. 말도 못하면서, 쯧!”
바께쓰를, 아니 양동이를 들고 올라가는 김철수 씨. 이병욱 씨는 그의 뒷모습이 그렇게 늠름해 보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