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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39호(2012.08)

[사이사이 사람 사이] 아버지의 종점

[사이사이 사람 사이]   글 : 윤지영 windnamu@hanmail.net   일러스트 : 이희은 eunilust@naver.com

 

아버지의 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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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교육계에 몸담았다가 퇴직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시점에서 아버지의 노후 계획은 어긋나버렸다. 손주 유학 보내주는 할아버지가 되기는커녕, 자식들에게 부담 주지 않겠다는 소박한 다짐마저 지키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버지의 자존심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손상된 자존심은 가족들을 향한 역정으로 표출되었다. 아버지가 가장 괴로워했던 것은 어머니를 끝내 호강시켜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가난한 집안의 8남매 장남에게 시집와서 남편 공부시키고 시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정작 당신과 당신 자식들은 뒷전이어야 했던 아내의 세월을 보란 듯 보상하겠다던 큰소리가 그야말로 흰소리로 전락해버리려는 참이었다.
"나중에 호강시켜주려고 했지. 그런데, 나중은 없더라." 곱디고운 소녀에서 골골 할망구로 변한 엄마의 인생이 전부 당신 탓이기라도 한 듯,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시간은 얼마 없고 일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되어 버렸는걸.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꿈같이 흘러가버린 한 생의 덧없음에 대해,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는 시간들에 대해, 뒤늦게 알아 버렸으나 어찌할 수 없는 마음에 대해. 감히 짐작건대 그건 마치 상대 팀에게 리드 당하는 가운데 9회 말을 맞은 타자의 낭패와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 도대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평생을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의 대차대조표에 마이너스 부호가 찍히기에는, 누구보다도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왔고,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맡은 책임의 120%를 해내며, 검소하다 못해 금욕적으로까지 살아오신 분들 아닌가.
그런데, 바로 그 점, 평생 앞만 보고 달려온 게 문제라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흔히 하듯 인생을 길에 비유할 수 있는 거라면 그 길에는 목적지가 있을 테고, 목적지에는 당연히 가장 먼저 도착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최선을 다해 길을 가는 게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종점을 향해 전력질주 했던 거고, 당연히 그 대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웬걸, 남은 건 후회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치솟는 배신감뿐.

그런 생각을 하신 게 어디 우리 아버지뿐이겠는가. 정년을 앞두고 고배를 마신 게 우리 아버지에게 크게 작용하긴 했겠지만, 일의 성패를 떠나 아버지 연배의 자수성가한 분들이라면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실 터, 종점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한눈을 팔아서도, 아파서도 안 되고, 심지어 잠시 멈춰 서서 숨 돌리는 것마저 죄책감을 가지며 달리는 게 성실한 삶이라 믿었던 게 잿더미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룬 그 세대들의 공유된 가치관이니 말이다. 그런 일념으로 당신 자신과 가족들을 채찍질하며 몰아온 덕에 자식들을 이만큼 키우고, 집안도 이만큼 일으키고, 또 우리 사회도 이만큼 성장한 건 분명하다.

그렇긴 한데, 그분들 각자에게 주어졌을 한평생의 시간이란 걸 생각해보면 왠지 아릿하게 마음 한 켠이 아프다. 누구에게나 한 번씩만 주어졌을 인생을 그렇게 휘몰아쳐 달려왔건만, 종점에는 그분들을 기다리는 성대한 환영식도, 화려한 꽃다발도 없다. 종점에 가까울수록 주변 풍경은 황량해지고, 인적은 드물어지고 낯설기만 하다. 내릴 곳을 지나쳐버린 취객과 변두리에 터를 잡을 수밖에 없는 초라한 행색의 승객들마저 떠나가고 텅 빈 버스들만 줄지어 모여 서 있는 텅 빈 공터, 마지막 정리를 마치고 서둘러 불이 꺼진 관리사무소가 허술하게 서 있는 곳, 그런 곳이 그분들 삶의 목적지였단 말인가. 그게 우리가 사는 목적이란 말인가.

설마 그럴 리는 없다. 버스의 목적지가 종점이 아니듯, 이 길을 가는 목적이 종점에 도착하는 게 아니듯, 우리가 사는 목적도 단지 종점에 도착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종점은 그저 차량이 모든 운행을 마치고 돌아가 정차하는 곳일 뿐이고, 때가 되면 돌아가야 할 곳일 뿐이다. 버스가 달리는 한 목적지는 그 버스에 탄 승객들이 가고자 하는 바로 그곳이며, 길이 뻗어있는 한 그 길을 걷는 것 또한 목적이 될 수 있다. 아니, 우리의 삶은 결코 노선을 따라 달리는 버스와 결코 같지 않다. 모든 버스는 정해진 노선을 따라 운행을 하고 정해진 종점으로 돌아와 운행을 마치지만, 우리의 삶은 바로 다음 정거장에서 운행을 마칠 수도 있다. 아무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우리 부모님은 종점을 향해 비교적 순조롭게 가고 계시다. 게다가 당신들 성에는 차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한 발 떨어져 생각해보면 나쁠 것도 없는 삶이었다고, 감히 말한다. 문제는 나의 삶이다. 종점만 보고 달리느라 지금 걷고 있는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는 시간들, 어서 종점에 도착하려고 서두느라 정거장을 그냥 지나쳐버린 맹목, 그래서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실을 것을 싣지 못한 채 속도만 내고 있는 탐욕, 당장 다음 정거장이 내 삶의 종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달리는 안일함. 종점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온 우리 아버지들이 내게 남겨준 유산이고, 인간이라는 종의 유전자에 새겨진 어리석은 DNA다. 결국 우리 삶의 종점에 이르러 한 생을 헛헛하게 느끼게 한 이유다. 햇볕 쨍한 날을 꿈꾸는 걸 포기하지 않되, 잿빛 가득한 장맛비 속에서도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껴야 할 이유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