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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리다>
거머리
글 : 박후기(시인) emptyhole@hanmail.net
장맛비 그치고
비바람에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운다
쓰러진 벼를 묶어세우듯
아버지 굽은 등 곧추세워 주고 싶은 나는
그러나 아버지 종아리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한 마리 통통한 거머리
피 같은 비가 내 가슴을 적시고
어디에서 떠내려 왔을까
도랑을 따라 흘러가는 사내들,
굵고 단단한 어깨에 새겨진 초록 문신
참을 인(忍)자는 지키지 못할 각서 같은 것
어차피 참는 자에게 복은 없었다
좋은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단다
부러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넌 그저 공부나 열심히 해라
나는 대답 대신 두렁에 삽을 꽂은 채
키 작은 옥수수밭에 숨어 들어가
땀에 젖어 담배를 피웠다
빗물에 씻겨 밑동이 드러난 옥수수 뿌리가
거머리처럼 흙의 피를 빨아먹고
삽을 함부로 내리꽂지 말아라
세상은 그렇게 쉽게 갈라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자식들에게 피를 빨린 아버지도 언젠가
저 벼 포기들처럼 힘없이 쓰러질 것을
나는 안다
거머리를 잊고 산 지 오래되었으나, 그렇다고 우리의 가난마저 거머리처럼 어딘가로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누가 당신의 살(肉)에, 나의 삶에 빨판을 대고 쪽쪽 피를 빨아 먹고 있는가? 골목 끝 동네 슈퍼마켓의 쥐구멍에, 비정규직 알바 소녀의 시급에, 하다못해 두부공장 콩나물공장까지 빨아먹겠다고 빨대를 꽂는 거대한 거머리들이 나라 도처에서 배를 불리고 있을 때, 거머리와 자식들에게 피를 빨린 엄마 아버지는 가난만 탓하며 시름시름 앓다 쓰러져 간다. 부모가 빨린 빨대는 그대로 자식에게 계승되어 피와 살과 영혼이 누대에 걸쳐 시추될 것이다.
- 박후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