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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45호(2013. 08)

[우린어떻노 부산살피기]공무원이 띄우는 오래된 사진 한 장_여성의 미래, 상투화된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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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이 띄우는 오래된 사진 한 장>

여성의 미래, 상투화된 여성


글 : 노진숙(공무원) jinsuknoh@hanmail.net

사진 제공 : 박숙희, 라효진님



  어릴 적 사진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재현할 수 없는 시간을, 그 속에 존재했던 나를, 그 이후 다시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을 지금 여기서 바라보는 것은 한없이 낭만적인 분위기로 또는 지워진 과거로 나를 데려다 준다. 동시에 실제 일어났던 ‘사실’과는 무관한 ‘과거’라는 이상한 ‘환상’으로 빠져들게 한다. 하지만 조금만 거리를 두고 사진을 쳐다보면 나를 타자처럼 바라보는 일,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나를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저 사진안의 나는 어떤 이데올로기 안에서 작동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마냥 즐겁기만 했던 시간들이었는데, 시공간을 떼어놓고 지금 여기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사진속의 인물들은 어떻게 훈육 받으며 여성으로 또는 남성으로 배치되고 있었던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성은 남성의 환상으로 존재해야만 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신화화되어야하는 존재다. 여신처럼 아름답지 않으면 자신을 희생해서 남성을 구원하는 존재. 그것이 여성에게 요청된 임무가 아닌가. 그래서 끝없이 성형과 다이어트를 하거나,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의 삶이 성공적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현재로서의 “여성”의 모습이다.


  사진 속 꼬맹이들은 한없이 행복하다. 그들은 신랑 또는 신부의 모습으로 치장하고 있다. 여자 아이들은 예쁜 꽃으로 머리를 두르고, 웨딩드레스를 상징하는 하얀 옷을 입고 있다. 상투화된 여성이 어린 꼬마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항상 여자”로서의 학습을 받은 여아들은 그것이 행복인양 밝게 웃는다. 드레스를 입고 꽃을 달아 남성들로부터 사랑받는 여성으로 성장하는 것이 행복인양 말이다. 웨딩드레스를 입는 것이 행복의 시작인 것처럼 체계적인 학습이 시작되는 유아기에 혼인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머리 수건을 두르고 가사 실습을 했던 시간을 떠올리면 미소를 머금게 된다. 내가 만든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맛 겨루기를 했던 시간은 교실을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놀이로 여겨지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교실이라는 틀을 벗어나 또 다른 틀 안으로 옮겨진 것에 불과한데 그것을 모르고 즐거워했으니, 그 천진한 여학생들의 행복을 어찌 나무랄 수 있으랴 싶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성”으로 길러지며,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진 속 여학생들은 여성, 모성이라는 신화 속에 갇힌 채, 자신이 갇힌 것도 모르고 아직도 굴러가고 있을 것이다.


  을숙도에서 찍은 사진은 정말 멋지다. 모델의 전형을 보는 듯 하다. 하지만 사진속 여학생은 너무나 상투적이다. 과거의 이미지들이 중첩되어 하나의 전형을 이룬 것, 그것이 현재의 시간 속으로 밀려들어 상투화된 여성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미래에는 어떤 여성을 상상할 수 있을까. 또다시 ‘새롭게 상투화된 여성’을 예측할 수밖에 없을까. 현재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는 사유할 수 없는 것, 지금 주어진 것으로는 포섭할 수 없는 것이 미래라면, “여성”은 어떻게 사유되어야 할까. 어떻게 상상되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