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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43호(2013.04)

[연간기획 상식의 파괴와 전복] 음악 실험실_실험음악, 기성을 전복시키는 시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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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험음악, 기성을 전복시키는 시도 2


글 : 서정민갑(대중음악의견가) bandobyul@hanmail.net


  세상에 완벽하게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과거가 없다면 현재는 존재하지 않고 현재가 없다면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에 있고 모든 미래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새로운 것을 만든다고 해도 그것은 최소한 과거의 누군가는 생각했던 것이거나 누군가가 이미 했던 것을 변형시킨 것이다. 어떤 천재가 나온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할 수는 없다. 인간은 다 비슷비슷하고 거기서 거기이다.


  음악 역시 그렇다. 지미 헨드릭스전기 기타 연주가 아무리 독창적이라고 해도 그가 처음 기타에 전기를 꽂은 것은 아니다. 힙합 뮤지션 가운데 최초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오른 디제이(DJ)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혼자서 힙합을 다 만든 것도 아니다. 존 케이지는 1952년 <4분 33초>라는, 아무 것도 연주하지 않고 연주를 마치는 작곡을 하고 퍼포먼스를 벌였다. 더 이상 음악으로는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음악 자체에 해 질문을 던진 것이다. 반드시 노래하고, 연주해야만 음악인지를 물은 것이다. 어쩌면 음악에 대한 형식적 실험은 이미 그때 다 끝난 것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나올 어떤 음악도 그의 음악보다 새로운 것은 없을지 모른다. 아무리 기괴한 소리를 내고, 아무리 비피엠(BPM)이 빠르고, 아무리 사운드가 크고, 아무리 장르가 뒤섞였다고 해도 음악은 이미 있던 음악의 후계이고 변형일 뿐이다.


  실제로 대중음악 메타데이터 데이터베이스인 올뮤직 가이드(http://www.allmusic.com/)에 정리된 수많은 대중음악 뮤지션들은 다 누군가에서 영향을 받았고, 또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어떤 음악을 들어도 신선하지 않다. 음악을 듣는 순간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았을까를 더 먼저 생각하게 된다.

기존의 장르 안에서 범주화되지 않는 음악은 없다. 최근 한국에 여성 뮤지션들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대중음악평론가 최지선이 정리한 섹시한 유형, 남성화 또는 중성화/무성화된 유형, 종교적인 또는 신비로운 유형으로 대개 다 정리되는 것을 보면 남성 뮤지션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음악적 참고목록(Reference)의 끝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민속음악을 만나게 되고, 클래식 음악을 만나게 된다. 정말로 꼰대 같은 얘기일지 모르지만, 옛 음악 속에 이미 많은 것들이 이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음악이 얼마나 새로울 수 있는가에 대해 되묻게 된다. 어차피 음악이라는 것은 누군가는 노래하고, 누군가는 연주하고, 누군가는 듣는 행위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음악은 바로 인간이 느낀 희애락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던가. 장르가 달라지고, 악기가 달라지고, 사람이 달라지고, 매체가 달라진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큰 맥락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음악이 항상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다른 시대, 다른 기술, 다른 지역, 다른 감성이 등장하면서 앞서 만들어졌던 음악의 내용과 형식을 바꾸는 실험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항상 똑같은 음악만 듣고 있을 것이다. 도전과 실험이라는 것이 늘 파격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정서적 충격과 방법적 차이가 큰 것들만을 실험적이라고 표현하지만, 충격적이었던 실험도 이후에는 일상화되어버릴 때가 많고 기존 음악의 테두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된 실험도 적지 않다. 지미 헨드릭스가 구사했던 연주법이 지금은 흔한 것이 되었다. 1980년대 이전의 트로트 음악과 그 이후의 트로트 음악을 완전히 바꿔놓은 주현미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신파와 청승이 주도적이었던 트로트 음악은 주현미 이후 ‘빠른 템포, 가벼운 느낌의 사랑 이야기’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 변화는 전혀 이질적이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단지 주현미 혼자서 만들어 낸 변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불어닥친 디스코 열풍과 한국의 경제 성장으로 말미암아 시대 정서의 변화, 카세트테이프의 등장 같은 것들이 함께 이 같은 변화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낸 것이다.


   실험과 변화는 단지 음악의 사운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음악을 재현하고 듣는 기술의 변화도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라디오가 등장하고, 티브이가 등장하고, 카세트테이프가 등장하고 소니에서 워크맨(Walkman)을 내놓았을 때, 뮤직비디오가 등장하고, 엠피쓰리가 등장하고, 인터넷이 등장하고, 유튜브가 등장했을 때 음악을 생산하고 재생하고 듣고 유통하고 마케팅 하는 방식은 얼마나 획기적으로 달라졌던가. 그리고 그에 맞춰 음악 역시 달라지지 않았던가. 비디오형 가수가 괜히 나왔겠는가. 2000년대 후반 대세가 된 케이 팝의 강한 훅(hook)은 인터넷 음원 사이트에서 미리 듣기로 구 여부를 결정하는 네티즌들을 재빨리 붙잡기 위한 접근이었다. 싸이의 엄청난 성공은 에스엔에스(SNS)와 유튜브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처럼 모든 변화는 맞물려 있고 그 변화는 파도처럼 다른 파장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제는 음악 양식과 메시지의 변화와 실험만을 주요하게 보지 말고 음악을 녹음하고, 재생하고, 공연하고, 즐기고, 계약하고, 마케팅하고, 홍보하는 모든 음악적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시도, 실험들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음악적 양식의 변화와 실험도 단순히 창작자 개인의 남다른 정서적 표출이라고 보지 말고 음악적 맥락과 시대적 맥락과 기술적 변화 속에서 읽어야 한다. 남다르고 유별나고 기괴한 음악만이 실험적인 것이 아니다.

이수만이 국내 음악 시장만을 겨냥하지 않고 아시아 시장과 유럽-미국 시장을 공략했던 것, 중요한 인디 레이블 가운데 하나가 된 붕가붕가레코드가 씨디를 구워서 팔면서 제작 비용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취했던 것, 최근 인디 뮤지션 아마츄어 증폭기가 그루브 그루마라고 이름 붙인 리어카를 끌면서 직접 음반을 팔고 있는 것, 얼마 전 싱어송라이터 시와가 음반 없는 음반을 발표해 음원만으로 들을 수 있게 한 것, 인디 뮤지션인 회기동 단편선과 박다함 등이 기존의 레이블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들만의 힘으로 자립음악생산조합을 결성한 것은 모두 이전까지는 잘 하지 않았던 시도였고 실험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와 실험은 새로운 장르와 음악이 만들어지는 것만큼 새로운 변화로 이어졌거나 아직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변화의 가능성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지금 어디선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모든 시도는 변화의 밑거름이 된다. 실험과 도전을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세상에 완벽하게 새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