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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43호(2013.04)

[연간기획 상식의 파괴와 전복] 불온한 고전_최북의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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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북(崔北)의 기행(奇行)

세상과의 치열한 불화 끝에 나오는 기행을 보고 싶다!



글 : 강명관(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hkmk@pusan.ac.kr



  조선의 사대부란 유학 외의 모든 것을 시시하게 여기는 풍조가 있었다. 유학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기에 인격의 수양과 정치을 벗어난 다른 모든 것은, 가치가 없거나 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예술도 그러하였다. 요즘 모든 예술가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우대받는다고 말할 수야 없겠지만, 조선시대에 비하면 그 대우가 훨씬 나아진 것만은 사실이다. 사대부들은 예술을, 또 예술가를 낮추어 보았지만, 그들의 생활이 예술을 결여한 것은 또 아니었다. 음악과 서화는 사대부들의 생활에 없을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 경우는 없었다. 음악을 연주하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기(餘技)였던 것이지 본업일 수 없었다. 그것을 전업으로 삼는 사람은 천한 악공이거나 환장이일 뿐이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예술이 감상의 대상이 될 만한, 일가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하여, 비록 천시를 받는 악공과 환장이라 할지라도 일가의 경지에 이르면 나름 세상의 이치를 깨치게 된다. 그 깨침이 없다면 예술가가 아니다. 하지만 깨친 눈으로 돌아보니, 세상은 그야말로 거대한 모순덩어리고, 그 모순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신세모순(身世矛盾)’을 절감하면 할수록 그 결과는 기행(奇行)으로 나타난다.

  

18세기의 화가 최북(崔北)은 어느 날 금강산 유람을 갔다. 구룡연(九龍淵), 곧 금강폭포에 올랐더니, 경치가 황홀하다. 이런 절경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최북이 아니다. 있는 대로 들이 붓고 눈물을 쏟으며 한참을 울더니 뚝 그치고 낄낄 웃기 시작했다. 가관이었다.

그러다 소리를 빽 질렀다.


“천하의 명인 최북은 마땅히 명산에서 죽어야 할 것이야.”


  이 말과 함께 최북은 냅다 구룡연으로 뛰어들었다.

최북이 죽었냐고? 아니, 그러면 기인(奇人)이 아니다. 구룡연은 구경꾼이 많은 곳이다. 사람들이 그를 잡아채어 물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떠메고 산 아래 너럭바위에 뉘여 놓으니, 숨을 헐떡이다가 갑자기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자신을 명인이라고 여기는 자부심, 명인은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는 그 발상! 최북의 발상과 행동이야말로 기인의 그것이라 말하기에 충분하다.


  최북은 그야말로 기행으로 일관했다. 세상을 오예시하기도 하였다. 서평군 이요(李橈)라면 영조 때 큰 부호이자 알아주는 종친이기도 하였다. 종친은 원래 벼슬을 하지 못하는 법이라, 이요는 예술 쪽으로 관심을 쏟아 자신은 거문과의 명인이었고, 또 수하에 많은 시정의 음악인을 거두기도 하였다. 최북 역시 이요의 집에 드나들었다. 어느 날 바둑을 두다가 이요가 자꾸 한 수만 물리자고 하자, 바둑판을 쓸어버리고는 “즐기려고 두는 바둑을 자꾸 물리면 1년이 가도 끝날 때가 없을 겁니다.” 하고, 다시는 서평군과 바둑을 두지 않았다. 종친과 두던 바둑판을 쓸어버릴 정도였으니, 최북은 간도 어지간히 컸던 것이다.


  이런 최북의 이면에는 세상에 대한 나름의 투철한 판단이 있었다. 수군(水軍) 훈련을 한다면서 조정에서 삼남(三南, 경상도․충청도․전라도) 백성을 들쑤셔 소동케 하자, 왜군은 수전(水田)에 능할 뿐이고 육전에는 능하지 않으니, 왜군이 와도 응하지 않으면 그만인데, 왜 난리를 피우느냐고 되물었다. 최북의 판단이 과연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무능한 조정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이 뚜렷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예술가로서의 기행을 일삼게 한 것일 터이다.


  기행을 일삼은 예술가답게 최북은 술을 너무나도 좋아했다. 술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으면, 책이며 종이를 다 퍼주고 술과 바꾸어 마셨다. 그리하여 가난은 그가 가장 가까이 사귀는 벗이 되고 말았다. 가난이 벗이지만, 먹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호구지책이 필요했다. 서울을 떠나 평양과 동래 등지를 떠돌아다니며 그림을 팔아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았다. 서울을 제외한 곳에는 제대로 된 화가가 없었던 탓에 그림을 그려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최북은 그림을 팔아 쏠쏠한 수입을 올렸는가? 그랬다면 또 최북이 아니다. 최북의 시대에 그림은 정해진 값이 없었다. 아직 예술가는 갑(甲)의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주는 대로 받는 수밖에. 그림이 제 마음에 흡족한데도 값을 기대 이하로 치르면 화를 내고 욕을 퍼부었고, 그림이 별로였는데도 값을 높게 치르면 깔깔거리며 웃고 그림 값도 모르는 놈이라 비웃었다. 그리고는 돈을 도로 가지고 가라고 밀쳐내었다. 이러니 돈을 벌 수가 없었다. 그림에 전문적 지식이 있는 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현재 남아 있는 최북의 그림은 수준 차이가 심하다고 한다. 아마도 위의 이유 때문일 터이다.


  최북은 결국 가난에 시달리다 한겨울에 얼어 죽고 말았다. 아내가 있었는지, 자식이 있었는지도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그가 도화서(圖畵暑) 화원이 아니었다는 것, 한갓 민간의 화원의 떠돌이 화가였다는 것뿐이다. 그의 가문이 어떠했는지, 어떤 경로를 밟아 화가가 되었는지도 미상이다. 최북이 만약 김홍도처럼 국가에 소속되어 일정한 보수를 받고 왕실과 사대부를 위해 봉사하는 화원이었다면, 그의 기행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김홍도에 대한 전기적 서술들은 그가 타고난 화가로서 절정의 기량을 보인 천재라는 데 집중되고 있다. 기행과는 거리가 먼 인물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홍도는 체제 속에 안주한 예술가이기도 한 것이다.


  마치자. 예술가라고 하면서 현실에 대한 분명한 판단도 없고, 제대로 된 작품도 없고, 뜨거운 창작열도 없고, 오직 어찌어찌 해서 얻은 예술가란, 작가란 이름만 내걸고 괴팍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을 더러 보았다.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을 빙자한 사기꾼이요, 인생의 낭비자다. 기행이 아니라 겉멋일 뿐이다. 정말 세상과의 치열한 불화 끝에 나오는 기행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