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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42호(2013.02)

[우린 어떻노 부산 살피기]시읽기, 사람읽기 : 시읽기, 사람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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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詩) 읽 기 , 사 람 읽 기



글 : 윤지영(동의대 국문학과 교수) windnamu@hanmail.net

일러스트 : 유미선 qqwe80@naver.com



서운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녀의 입꼬리가 실룩거린다.

힘들지 않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 끝이 갈라진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들의 눈동자가 서로의 어깨 너머를 향하고 있다.

어떤 것이 진심일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알기 위해 말을 하고 그 말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만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화를, 방문을 열고 서로의 방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면,

말과 말 사이의 침묵, 눈에 보일 듯 말듯한 몸짓,

그리고 표정 같은 비언어적인 것들이야말로 그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이 열쇠 없이 우격다짐으로 방문을 열려고 할 때 관계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문학을, 특히 시(詩)를 읽어야 할 이유이다.


이 지점에서 뜬금없이 웬 시냐고? 시의 ‘시’자만 나와도 부담스러워지는 독자들을 위해 우회해서 이야기해보자. 우리에게 그나마 친숙한 영화가 좋겠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영화가 있다. 첫번째 종류는 사건들이 어째서, 왜, 그와 같은 식으로 발생했는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여러 개의 작은 사건들은 단 하나의 의미심장하고 임팩트 있는 궁극의 목적 또는 결말로 수렴된다. 인물들의 감정은 그들의 대사를 통해 명료하게 밝혀진다. 이러한 부류를 편의상 충분히 말하여진 영화라고 부르자.

두 번째 종류는 사소하고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디테일과 미장센만 두드러지는 부류이다. 극적인 사건도 없을뿐더러 설사 있다고 해도 사건과 사건의 인과 관계는 느슨하기 짝이 없다. 개다가 등장인물들은 어찌나 과묵한 지. 말을 하긴 하는데,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니다. ‘차가 너무 식었군.’이라거나 ‘손톱깎기 어딨어?’ 같은 말이 고작이다. 이런 시시콜콜한 말들은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정보를 주지 않는다. 충분히 말하여지지 않은 영화이다. 소위 예술 영화라 부르는 부류들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첫 번 째 부류, 그러니까 충분히 말하여진 이야기를 더 선호한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보러 영화관에 간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나야 ‘영화 좀 봤다’는 기분이 든다.

그에 비해 충분히 말하여지지 않은 영화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심지어 불쾌하게까지 만든다. 이런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서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뭐 씹은 표정이다.

어떤 영화가 더 좋은 영화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어떤 영화든, 어떤 이야기든 다 각자의 역할과 의의가 있으니까. 다만 왜 충분히 말하여지지 않은 이야기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심지어 불쾌하게 만드는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는 시를 읽는 게 왜 필요한 지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충분히 말하여지지 않은 영화는 충분히 말하지 않는 애인과 같다.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나는 무슨 말이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저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밖만 바라본다. 아니면 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다.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빼놓고 얘기한다. 충분히 말하여지지 않은 영화처럼 말이다. 그 결과 상대는 점점 멀어져가고, 나는 조롱당하거나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다가, 급기야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돼서 폭발한다. 이제 내 앞에 앉아 있는 저것은 더 이상 내가 사랑하던 그 사람이 아니다. 그저 불가해한 무엇이다. 충분히 말하여지지 않은 영화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도 이와 같다. 말하여진 것밖에는 듣지 못하고, 보여주는 것 말고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물론, 묻는 말에 대한 성실한 대답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보자. 그러면 다 납득이 가는가? 상대가 무엇 때문에 서운했는지 이야기하면, 사실은 무척 힘들다고 말하면,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말을 하면 우리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가 말이다. 아! 우리는 그 말을 대체로 그대로 믿는다. 단, 내가 듣고 싶은 말인 경우에 한해서 그렇다. 충분히 말하여지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내가 듣고 싶은 바로 그 대답을 해준다. 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지 다음 장면에서 보여준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유도 말해준다.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 진행되면 뻔해서 재미없다고 투덜대지만, 그래도 가닥 잡기 힘든 영화보다는 그런 뻔한 영화를 선택한다. 사건의 전모와 인물의 실체가 확실하게 포착될 때 우리는 안심하게 된다. 아, 내가 저것을 이해했구나!

내 애인도 그와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충분히 말하여지든, 충분히 말하여지지 않든, 내 애인은, 아니 인간은 언제나 말하여진 것에 비해 말하여지지 않은 부분을 더 많이 갖고 있는 존재다. 따라서 이 말하여지지 않은 부분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건너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

기대는 배반당할 수 있고, 예측은 깨어질 수 있다. 이 불안이 발견의 기쁨과 소통의 환희를 보장한다. 불안이라는 대가 없이 얻어지는 소통은 가짜다. 내 예측과 기대대로 흘러가는 영화를 볼 때 얻는 쾌감이 자기만족적인 데 그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관계 속에 있는 우리 모두는 꼼꼼하게 읽혀지기를 바라는 텍스트다. 두고두고 읽혀지며 곱씹어지기를 바란다. 내가 말해준 것 너머의 불확실성과 말해준 것들 사이의 침묵까지도 읽혀지기를 바란다. 마치 시(詩)와 같다. 따라서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다른 어떤 예술보다 더 많은 침묵을 내장한 시를 자주 읽는다면 서로에게 오롯이 다가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