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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42호(2013.02)

[우린 어떻노 부산 살피기]공무원이띄우는오래된사진한장 : 오래된 신분증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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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신분증을 보며



글 : 노진숙(공무원) jinsuknoh@hanmail.net

사진제공 : 부산진구청 교통행정과 노영철, 행정지원과 예준영,

 민원여권과 정선조님, 민원여권과 조광제님



말없이, 이름 없이 _ 무명의 용사1)처럼

종이로 만들어진 주민등록증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글씨가 번지거나 사진이 일그러진 적이 있을 법하다. 이러한 종이 주민등록증의 문제점을 바로잡은 것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형태의 주민등록증인데, 주민등록증을 갱신했던 정비기간(정책실행기간)동안 동사무소는 몹시 붐볐다. 주민들은 6개월 이내 촬영한 사진을 동사무소에 제출해야 했는데

개인의 비용절감을 위해 동사무소마다 디지털카메라가 지급되었고, 이 때문에 동사무소는 사진관이 되었던 것이다. 담당직원은 한쪽 벽에 주민을 한 명씩 세워놓고 성의를 다해 셔터를 눌렀지만, 비전문가의 솜씨가 그들의 성에 찰 리 없었다. 정책을 기획했던 자는 이미 인센티브를 받았을 터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드러나는 정책의 오류-사진이 맘에 들지 않아 다시 찾아오는 국민의 숫자와 그 원성을 두고라도, 당시는 귀했던 디지털카메라 구매에 따른 예산집행을 둘러싸고, 죄를 뒤집어쓴 정책실행자는 정책기획자를 한없이 원망만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렇다면 정책기획자와 정책실행자, 그리고 정책대상자는 각각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떤 관계망에서 정책은 완결된 것일까. 말 없는 무명용사가 된 정책실행자는 무엇을 한 것인가. 말 없는 행동은 자신을 드러내는가. 이 물음에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대답한다.

“말을 수반하지 않는 행위는 계시적 성격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체도 상실한다. (중략) 말 없는 행위는, 행위하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다. 행위자는 그가 동시에 말의 화자일 경우에만 행위자일 수 있다.”2)


사유(思惟) 없이, 이유 없이 _ 명령 없이는 실행도 없다.

며칠 전, 일관되지 않은 기관장의 명령을 따라야 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중간관리자인 ㄱ씨는 이런 말을 했다. “당신과 나 사이의 이런 대화는 불필요합니다. 우리는 명령대로 실행만 하면 되지요.”

“지식을 명령 및 지배와 동일시하고 행위를 복종 및 집행과 동일시한 플라톤적 개념”3)은 행위를 시작(archein)과 성취(prattein)로 나눈다. 시작은 사유의 결과를, 성취는 행위를 제거한 명령의 단순한 실행을 일컫는다. 그러면 이제 ㄱ씨는 어떤 사람인지 밝혀진 셈인데, ‘시작’을 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주홍글씨를 ㄱ씨에게 붙인다면 그는 억울해

할까. 그는 과연 ‘탄생’이라는 ‘시작’을 어떻게 실현하고 있는 것일까.


시간 없이, 공간 없이 _ 그러므로 세계 없이 

근대는 경제활동의 비중이 늘어나 개인의 생계가 중요해지면서 삶의 과정이 노동의 과정에 예속되었고, 시작도 끝도 없는 생산과 소비의 구조에 파묻히고 말았다. 이러한 시간없는 시간성과 함께,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공적 장소를 잃어버림으로써 개인은 사적인 세계에 갇히고 만다. 타인의 현존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 타인을 만날 수 있는 공적 공간, 즉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할 수 있는 장소를 잃어버림으

로써, ‘정치적 인간’은 사라지고, ‘생물학적 인간’으로서 충실한 삶을 살게 된다. 말과 행위로 자신의 존재를 현현하고 세계를 넓혀가던 인간이 그것을 잃어버림으로써 “짐승 또는 신”4)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근대 이후 공적 세계의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는 반면, 사적 세계로 유입하는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공적 공간의 성격이 두드러진 시골이 왜소해지고 사적 공간으로서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도시가 비대해지는 것만 보더라도 개인들은 자신을 사적인 공간 속으로 정체를 숨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잃어버린 말과 행위를 찾아가는 길 _ 비극에의 참여, 공통세계의 회복, 연극적 실천으로 

말과 행위는 공적 장소에 개입하는 것이기에 다분히 수행적이다. 타자에게 관람되어지는 나는, 무대에 선 배우처럼 자신의 정체를 관람자들에게 노출하는 것이므로 말과 행위를 통합해 나가야 한다. 말과 행위의 일회성과 우연성이 한결같이 수행될 때 공적인 세계에서 신뢰는 확보되며,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무대가 형성된다. 말과 행위를 회복하여 공적 세계를 찾아가는 길은 관객을 찾아 떠나는 길이고, 관객에게나 자신을 보여주는 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비극을 “고귀하고 완전하며 위대한 행위의 모방”5)이고, 행위의 모방이야말로 비극에의 “가장 긴밀한 참여”6)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 세계에서 내가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긴밀한 참여로써의 고귀하고 완전하며 위대한 행위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비극에서 배우들이 보여주었던 ‘긴밀한 참여’와 말과 행위의 개입을 통한 ‘공통세계의 회복’은 말과 행위를 통해 타자에게 접근하는 '연극적 실천'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나는 요사이 말을 붙이는 연습을 한다. 중간관리자 ㄱ에게, 동료 ㄴ와 ㄷ에게, 그리고 나와 부딪히는 사람들에게. 마치 새로운 말을 배우듯 어눌하고 더듬거리며 말을 건다. 나의 말은 주파수가 잡히지 않는 전파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말의 촉수를 길게 뻗어 내 언어가 그들에게 가 닿기를 희망한다. 이것은 탄생을 실현해 가는 길이며, 정치적 행위의 가능성에 물꼬를 내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읽히지 않는 존재로 오래도록 걷게 되리라 예측한다. 나 자신을, 또는 누군가를 사적인 세계에서 공적인 세계로 이끌어내는 일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폐허가 된 자리에서 한 말과 행위는 서서히 싹을 틔우리라 희망을 가져본다.


1) 한나 아렌트는 무명용사를 “자신의 업적은 박탈당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인간존엄

을 약탈당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외

역, 민음사, 1996, 241쪽.

2) 위의 책, 239쪽.

3) 위의 책, 289쪽.

4) “짐승도 신도 행위의 능력은 없다. 행위만이 오로지 타인의 지속적인 현존을 자신

의 전제조건으로 삼는다.” 위의 책, 74쪽.

5) 김상봉, 『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 한길사, 2003, 48쪽.

6) 위의 책, 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