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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42호(2013.02)

[우린 어떻노 부산 살피기]손바닥소설 : '조만간 보자'를 물리친 늠름한 김철수 씨와 이병욱 씨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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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보자'를 물리친 늠름한 김철수 씨와 이병욱 씨를 보라

늠름 병욱 시리즈 ‘부산병’ 특집!



글 : 배길남(소설가) rakesku@hanmail.net

일러스트 : 전진경 wjswlswls@naver.com




부산에선 별로 친하지 않은 사이에서 이뤄지는 인사가 “조만간 한번 만나자”, “언제 소주 한잔 해”라는 말들이다.

날짜가 없는 이런 말들은 지켜지지 않고 공수표가 되고 십상이다. 문제는 이런 풍토가 용인되고, 그걸 상대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 국제신문』<부산병, 이대로 안 된다.> 특집 中에서


“니, 일본에서 소포 왔더라.”

“예? 일본에서 무슨….”

어머니가 손짓하는 책상에는 정말 소포가 와 있습니다. 한자가 적혀있는 주소는 정확하게 그가 다녀온 일본 야마구친 현의 야나이 시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소포를 열어보니 편지 한 장과 장갑한 켤레가 들어있습니다.


‘ TO 이병욱 씨에게

오래간만입니다. 추워져 왔습니다만 몸은 괜찮습니까? 자그마합니다만 일의 방해를 해 버린 사죄와 신세를 진 감사의 기분을 담아 선물을 선물합니다. 만약 좋으면 사용해 주십시오. 그러면 무리는 해지 않도록 일을 열심히 해 주십시오. 그리고 다음 달에 부산에 1박 2일로 갈 예정입니다. 꼭 만나면 좋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FROM 우에다 준코가. ’


샤프로 직접 쓴 편지는 문법이 조금 틀렸지만 정성이 가득합니다.

“준코 씨…. 아, 맞다. 한국어 공부 많이 했네.”

이병욱 씨는 머리를 긁적이며 장갑과 편지를 번갈아 봅니다. 준코는 지난 번 일본에 갔을 때 선배의 소개로 만났던 일본 여성입니다. 야나이 시 주변의 관광을 도와주기도 했고, 고마워서 헤어질 때 연락처를 주고받았던 사람입니다. 병욱 씨는 한국에 가면 책과 선물을 보내준다고 했었고, 친구 김철수 씨는 부산에 오면 책임진다고 큰 소리를 쳤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고 두 달쯤 지나자 그런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이병욱 씨는 살짝 무안한 느낌과 왠지 모를 부담감에 한숨을 쉬었습니다. 답례로 선물을 보내려 해도 뭘 보내야 할 것이며, 국제 소포는 어떻게 부쳐야 할지, 또 돈은 얼마나 들지….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이병욱 씨는 일단 친구에게 전화를 겁니다.


“어어, 철수가? 니 혹시 집에 소포 안 왔더나?”

“어! 니도 준코 그 여자한테 소포 왔더나? 거…, 와 이라노? 부담스럽구로. 이거 우짜지?”

“야이, 자슥아. 니가 주소고 뭐고 먼저 써 줬다 아이가? 부담스럽기는 뭐가 부담스럽노? 고맙지.”

“웃기고 있네. 새끼야, 그라는 니는 책이고 뭐고 보내줬더나?”

몇 마디 하는데 벌써 엇박자가 나기 시작합니다. 앞에서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놓고 막상 연락이 오자 어쩔 줄 모르는 것은 두 사람이 똑같습니다.


“마, 내는 지금이라도 보내주면 그만이지만 니는 준코 씨 부산 오면 가이드 해야 될 거 아이가?”

“뭐라하노? 내가 시간이 되나? 니가 가야지.”

“뭐? 내는 안 바쁘나? 니 임마, 그라고 사람이 그라는 기 아이다. 그때 일본에서 사람들이 우리한테 얼마나 잘 해 줬노?

“잘났다, 새끼야. 누구는 뭐 고마운 것도 모르는 인간인줄 아나? 바빠서 그란다 아이가? 아이씨, 그래도 그렇지. 그냥 예의상 인사한 거 그 여자 너무 오바하는 거 아이가? 사실 그렇다 아이가? 니도 귀찮은 건 마찬가지제?”

김철수 씨를 탓하던 이병욱 씨였지만, 사실 친구의 말이 틀린 게 없다고 느껴집니다. 도리어 자기 마음을 너무 잘 읽어서 탈입니다.


“아아, 모르겠다. 장갑도 이거 좋은 거다. 최소한 답례는 해야 될 거 아이가?”

“모르기는 뭘 모르노? 일단 다음 달에 준코 씨 오면 같이 만나는 거로 하자. 바빠도 우짜겠노?

1박 2일이면 분명히 관광 패키지로 오는 기다. 일정이 있을 끼니까, 저녁쯤 자유시간에 잠시 보면 될 거 아이가? 답례 선물은 그때 주면 되겠네?”

이병욱 씨는 어느 순간 갑자기 똑똑해지는 친구가 한없이 대견스럽습니다. 걱정거리도 다음 달로 일단 넘기고, 귀찮은 수순도 간단히 정리되며, 부담감을 서로 덜어줄 수 있는 절묘한 한 수입니다.


“알았다. 그라자. 딱 좋네! 그라고 조만간 한 잔 하자.”

“그래, 날 한 번 잡아서 한 잔 하자.”

전화를 끊은 이병욱 씨는 편안한 마음으로 소포를 책상서랍에 넣습니다. 그러나 편안한 마음은 곧바로 사라집니다. 당장 내일까지 처리해야 할 서류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며칠 후에 있을 여자 친구와의 백일 기념 파티도 준비해야 합니다. 몇 번 만났던 사람, 그것도 자주 못 볼 외국인까지 신경 쓰기엔 너무나도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하루입니다.

서류를 작성하기 위해 컴퓨터를 켜는 이병욱 씨.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그는 잠시 눈을 감습니다. 갖가지 상념(想念)들이 그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러던 중 상념 한 놈이 지나가지 않고 뺑뺑이를 돕니다. 그건 일본에 있는 선배의 모습으로 바뀌더니 곧 있지 않아 선배의 넋두리로 진화합니다. 그것은 두 달 전, 일본에서 들었던 넋두리입니다. 출장 갔다 돌아온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술에 취한 선배가 쓸쓸한 목소리로 했었던 이야기입니다.

“있잖아, 내가 일본 온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그런데 말이지. 후우, 제대로 된 친구가 거의 없어. 여기 애들 겉으로는 스미마셍, 아리가또 이러지만 겉 다르고 속이 다른 게 많아. 나 일본에 온 초반에 이런 적이 있어. 한 친구하고 되게 친해진 줄 알았는데, 그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오겠다는 거야. 그래서 그 다음날 나는 방을 청소하고 장까지 봐서 점심을 준비했었어. 그런데 하루 종일 기다려도 그 친구가 오질 않는 거야. 한마디로 바람을 맞은 거지. 일본에 와서 사람이 그리웠는지 그날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라구. 더 웃긴 건 뭔지 알아? 약속을 어겼던 그 친구가 날 대하는 게 평소하고 똑같았다는 거야. 정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한국 직장상사한테 한 번 물어봤어. 이런 경우가 혹시 있냐고. 그러니까 그 사람이 뭐라는지 알아? 웃으면서 자기도 그런 적이 있다는 거야. 말 그대로 일본식 인사말이었다는 거지. 그것도 모르고 장까지 봤으니…. 하하. 나도 이제 5년쯤 지나니까 그게 인사말인지 진심인지 구분이 간다. 아이구…, 그건 그렇고 한국이 그립다, 그리워.”

“에이, 그라믄 되는가? 일본 아아들 이상하구만! 인사가 뭐 그렇노?”

“선배, 우리는 절대 안 그라지. 특히 우리 부산 사람은 약속 하나는 철저하다 아입니꺼?”

“하하, 그렇지? 너희는 부산사람이지?”

이병욱 씨가 눈을 뜹니다. 선배의 말이 곳곳에서 자신을 찔러댑니다. 책상 서랍을 연 이병욱 씨는 준코 씨가 보낸 장갑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조만간에, 다음달에, 며칠 후에, 있다가, 어디에 가면….

자신이 던졌던 공수표들이 공중에서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이건 뭐 선배가 말했었던 일본의 나쁜 예와 별 다른 게 없습니다. 이병욱 씨가 한숨을 쉬는데 전화벨이 울립니다.


“여보세요. 어, 철수가?”

“있다 아이가…, 오늘 시간 되나?”

“와? 조만간에 보자 했다 아이가?”

“에이씨! 그라믄 언제 본 적 있더나? 소포 받고 뭐가 와 이리 찝찝하노? 오늘 되나 안 되나?”

김철수 씨가 버럭 화를 내는데 이병욱 씨는 슬슬 웃음이 나옵니다.


“화를 내고 지랄이고? 알았다. 대신에 딱 한 잔만 하는 기다이? 그라믄 있다가….”

“있다가고 지랄이고 빨리 나온나. 너거 집 앞에 다 와간다.”

전화를 끊은 이병욱 씨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준코 씨가 보낸 장갑의 포장을 뜯습니다. 겨울밤은 춥지만 손은 따뜻할 겁니다. 친구와 소주 한 잔 하면 가슴도 따뜻해지겠지요. 이병욱 씨의 방에 불이 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