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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41호(2012.12)

[초가삼간일지라도]백년의 추억을 걷는 중앙동 해관길

백년의 추억을 걷는 중앙동 해관길

 

 

 

홍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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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 조용할 것 같은 중앙동 해관길의 아침이 시작됐다.
출근을 하는 회사원들이 이 시간에 해관길을 거닐기에는 조금 이르지만 이상하게 중앙동 부산 데파트 뒷길은 이 시간이 되면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골목길사이로 카페들이 하나 둘씩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기에는 정말 이른 시간임에도 골목 안에 그윽한 커피향으로 진동을 한다.

해관길은 사실 1900년대만 하더라도 바다였다.
초량왜관 자리에 용두산 주변으로 제한되었던 일본인 거류지역을 확대하기 위한 방법으로 택한 것이 바로 바다를 메우는 방법이었다.
당시 초량왜관의 관수왜가로 중심으로 동서로 나뉘어 공간을 행정과 생활공간으로 구분하여 생활했던 이곳이 육지 쪽으로는 오늘날의 대청동, 부평동, 보수동, 대신동 방향으로 정비 지역을 확대 되었으며 반대편인 바다를 메우며 그 영역을 넓혀갔다.

당시 일본인들이 바다를 택한 이유는 조선인이 살던 초량, 부산진 방향은 산과 바다로 막혀져 있어 시가지를 확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02부터 1912년까지 북항 매축공사와 영선산 착평공사를 진행하였다. 이 공사로 부두시설, 세관, 부산역 등을 마련하여 일본과 조선의 물류이동을 원활히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막혀있던 물론 일본인 거류지역과 조선인 마을이 도로망으로 연결할 수 있었다. 이로인해 1914년 부산부의 관할구역 또한 초량, 부산진까지 확대될 수 있었다. 그러니 해관길 주변을 메우는 작업에서부터 부산의 근대기 도시형성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후 이 길 주변에는 1930년대 초 까지 부산부청사가 있었으니 명실상부한 부산의 행정적 중심지였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지인 해관길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일본인들이 꾸준히 찾았던 장소이고 부산 속에 또 다른 모습의 부산이 나타나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도로를 사이에 (옛) 김원우 치과를 중심으로 주변의 적산가옥들이 즐비하게 놓여있다. 그러니 빌딩타입의 건축물보다 초록색 박공형 지붕이 아주 높게 서있고 건너편 찻집과 약국은 드르륵거리는 미서기 문과 넓은 창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조금 깊숙이 들어가 보면 (옛) 부청사(초량왜관 당시 관수왜가 자리)로 올라가는 화강석 계단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다시 아침 6시
여전히 오고가는 사람들이 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그 사람들 속에 있다 보면 여기는 한국이 아니다. 바로 일본이요 중국이다. 왜냐하면 이 이른 아침을 깨우는 사람들이 바로 일본인, 중국인 관광객들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호텔에서 조식을 먹기 위해 관광객들이 이 거리로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관길의 아침에 상점들은 일찍 문을 열고 장사를 시작한다. 이 길이 요즈음 이른 아침의 새로운 즐거움을 주고 있다. 도로변 건물사이에 작은 골목길에 6시에 여는 카페가 생겨나고 모닝구셋또라는 일본어로 되어있는 카페 간판에 불이 들어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A 라는 카페는 아침에 신선한 과일과 샐러드, B라는 카페는 핸드드립 된 커피로 손님을 유혹하고 C라는 카페에는 샌드위치가 모닝구셋또를 구성한다. 그리고 통일되게 삶은 계란과 토스트가 함께 손님에게 제공되고 있다. 아침부터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골목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어느 카페로 갈지 고민하는 모습이 해관길에서 보여지는 이국적인 풍경이다.

사실 엄격하게 따져보면 이 해관길은 근대기에도 조선인들이 다니던 곳이라기보다는 일본인, 외국 공관들이 다녔던 길이었으니 놀라운 풍경도 아닐 테지만 약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모습이 지속되고 있으니 이 길은 100년 동안 그 모습들이 누적된 곳이라 할 수 있다.

10월말 다시 이 길을 찾았을 때 얼마까지 서있던 적산가옥 하나가 무너지고 있었다.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나에게 벽돌 몇 장이 보여 얼른 주웠다. 아쉽기도 하고 100년 전의 흔적을 간직하고 싶은 욕심에 체면불구하고 벽돌을 줍고 있는 나에게 일하시는 분이 물어보신다. “머할라꼬 뒤집니까? ” “벽돌이 예사벽돌이 아니 여서요” 그렇게 모은 벽돌이 7장. 더 들고 오고 싶었지만 내가 들고 올 수 있는 한계가 이 정도였다. 너무나 아쉬워서 페이스 북에 철거현장을 올리니 어느 친구가 나에게 질문한다. 땅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냐고 말이다. 한참을 고민했다. 100년 전에 그 땅이 정말 무엇을 기억할까? 고민 끝에 그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답을 적었다. 팍팍 깨진 타일과 벽돌조각 그리고 나무잔재들이 땅에 다져지고 그 위에 다시 건물이 지어지니 땅은 그냥 땅이야. 단지 기억은 다시 땅이 되어버린 건물의 잔재들이 하는 거라고 그래서 난 벽돌을 주워온 거라고 말이다. 그 땅을 기억하기 위해서...

누군가에게는 이 땅이, 이 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반면 어느 누군가는 그 땅을 기억하며 삭막한 도시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도시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해관길은 아마 다시 변해갈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없어진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지만 기억에 대한 즐거움으로 그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에피소드
철거된 그 공간에 무언가가 지어지고 있겠지 라는 기대로 다시 찾았을 때 난 다시 허무함을 느꼈다. 그 곳은 주차장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