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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47호(2013.12)

[연간기획] 예술행동_ 안해룡과 일본의 조선학교, 집단적 예술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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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기획] 예술행동_ 안해룡과 일본의 조선학교, 집단적 예술의 실천

 

글, 사진제공 : 김강(미술가, 미학연구자) parasolhs@hanmail.net

 

 

 

 

 

안해룡과 일본의 조선학교, 집단적 예술의 실천

 

 

후쿠시마 그리고 센다이 조선인학교

 

2011년 3월 11일, 대지진의 충격파로 후쿠시마원전이 폭발했다. 뒤이어 쓰나미도 덮쳐왔다.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원전폭발과 쓰나미 피해의 현장은 도무지 현실이라고 믿기엔 너무 끔찍했다. 후쿠시마의 재앙 이후 일본은 이제 외국 사람들이 방문하길 꺼리는 죽음의 땅으로 변해가고 있다. 정부는 방사능을 통제하고 있다고 연일 떠들고 있지만 이를 믿는 국민들은 별로 없다. 오랫동안 후쿠시마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왔던 사람들조차 속으로는 하루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달리 도리가 없어 체념하고 살뿐.

 

그런 와중에, 원전이 폭발한 후쿠시마가 포함된 일본 동북지역의 ‘센다이’로 날아간 한국인이 있다. 다큐멘터리 작가이자 사진가인 안해룡. 쓰나미와 함께 몰아닥친 지진으로 4층 교사가 붕괴위험에 있는 도호쿠조선초중급학교를 찾아갔다. 여진이 남아 계속 땅이 흔들리고 있는 조선학교를 돌아보며 망연자실할 수만은 없었다. 현장의 이야기를 한국에 전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오사카, 홋카이도, 가나가와 등에 있는 동포들은 구호물자를 트럭에 싣고 달려왔다. 한국에 이런 사실을 전달함으로써 무언가 움직임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필요한 것은 너무도 많았다. 한국에서 일본의 조선학교를 생각하는 사람들과 뜻을 함께해서 지원하는 모임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몽당연필’을 만들었다. 그렇게 동일본대지진을 계기로 일본의 조선학교와 한국은 다시 연대하고 있었다.

 

안해룡이 일본의 조선학교와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3년, 일본기자의 취재를 도와주면서부터다.

 

2002년에는 재일조선학교 모금공연의 코디네이터 역할을 자처하면서 재일조선인커뮤니티와 좀 더 깊어졌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한 달에 두어 번 일본을 방문하던 그는 2008년에는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학교다_도요하시> 전시를 일본 아이치현 도요하시에 있는 도요하시조선초급학교와 서울 문래동의 프로젝트스페이스 랩39 전관에서 열었다. 서울전시에서 그는 영등포구 철공소 단지의 건물 하나를 ‘조선학교’로 바꾸어 버렸다. 입구에 들어서면 도요하시조선초급학교의 건립부터 현재까지의 역사가 복도에 빼곡하다. 본 전시장에는 안해룡이 5년간(2002-2007) 촬영한 도요하시조선초급학교의 여러 장면이 펼쳐지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에는 그가 미처 사진으로 뽑지 못한 디지털이미지들을 영상으로 만들어 상영했다. 옥상에는 도요하시에 만들어진 조선학교의 모습을 이미지화해서 실물 목조 건물을 재현했다. 한옥전문목수가 일주일 동안 만든 도요하시조선초급학교 교사에는 ‘미술시간’에 학생들이 실제로 그린 그림과 시간표 등이 전시됐다. 전시오프닝에 도요하시에 사는 동포들이 직접 참석해 학교 간판을 옥상에 건립된 목조교사에 달았다. 서울에 사는 재일조선학교 출신 유학생들의 ‘쟁강춤’ 공연과 배우 권해효의 축하노래도 이어졌다. 일본인 취재기자도 막걸리에 취했다. 한국, 일본, 재일조선인. 국적과 사는 곳이 달랐어도 그들 모두 그 순간만큼은 ‘재일조선학교’의 일원이 되었다.

 

재일조선학교_‘타자’로서의 우리

 

일본의 조선학교는 분단 이전부터 일본에 살던 조선인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말, 우리역사를 배우는 학교다. 비극적이게도 ‘총련’과 ‘민단’으로 갈라진 조선인/한국인 커뮤니티는 분단국가 한반도의 축소판이 되었다. 그러하기에 남한에 살고 있는 한국인에게 ‘총련’의 지도를 받는 재일조선학교는 분명한 ‘타자’로 혹은 또 다른 ‘분단선’이다. 그러나 안해룡은 조선학교와의 활동을 통해 분단선을 넘나들고 있다. 그에게 ‘조선학교’는 남/북 분단의 상징이기보다는 일본에서 차별받고 억압받는 조선인들, 사회적 약자이지만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가려하는 커뮤니티일 따름이다. 안해룡은 일본의 조선학교의 ‘외부인’이기보다는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안해룡은 재일 조선인 스스로 만든 조선학교의 역사, 그리고 현재가 무엇보다도 훌륭한 예술작품이라고 믿었다. 그들 모두가 공동으로 만든 예술작품이 곧 조선학교임을 스스로 확인하게 하고 싶어 했다. 그러하기에 그의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학교다_도요하시>전시에는 그가 직접 찍은 작품들보다는 그가 수집하고 정리한 조선학교의 자료가 더욱 깊은 공감대를 얻었고 공명했다.

 

또 한 번의 다른 접속

 

2010년 10원 12일. 도쿄의 에다가와에 있는 도쿄조선제2초급학교에서는 <야키니쿠-에다가와에서의 아티스트 액션(Yakiniku - Artist Action in Edagawa)>이라는 전시축제가 4일간 열렸다. 도쿄의 에다가와 지역은 40년대에 도쿄올림픽을 치르겠다며, 개최 예정지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을 집단 이주시킨 지역이다. 지금은 뉴타운으로 주목을 받고 있지만, 조선인들이 강제로 이주당했을 당시에는 허허벌판의 매립지였다. 이 허허벌판에서 판자를 이어 학교를 만들고 커뮤니티를 재건했다. 핍박은 오히려 커뮤니티의 결속을 가져왔다. 그렇게 60여 년이 지난 2000년 초반 도쿄도는 조선학교가 토지를 무상으로 사용하고 있다며, 사용료를 내라고 압박해왔다. 지난한 재판투쟁이 이어졌고 결국 재판부는 에다가와조선학교의 손을 들어주었다. 도쿄도의 요구가 무리가 있다면서 화해하도록 판결을 냈기 때문이다. 이후 신교사 건립을 위한 운동이 일어났고, 재일동포와 일본, 그리고 한국의 시민들이 연대해 새로운 교사가 완성됐다.

 

신교사의 건설 과정을 취재하고자 학교를 방문했던 안해룡은 곧 해체될 도쿄조선제2초급학교의 낡은 교사에서 전시회 등을 해도 좋은가를 학교 관계자에게 상담했다. 학교 관계자는 교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일본에 있는 재일과 일본인 예술가들에게 아트이벤트를 제안했다. 특별히 기획자가 있는 것도, 큐레이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공간을 기억하고, 그 공간에서 함께 모여보자는 것.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 예술로 그 시간과 공간을 함께하자는 제안에 약 70여 명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사진, 설치, 비디오 영상이 되어 에다가와조선학교의 낡은 교사에 전시되었다. 교사와 운동장이 미술관으로 변했고, 이 예술축제에는 주민들도 동참했다.

 

전시 마지막 날 일본에서는 ‘아키니쿠’라 불리는 불고기 파티가 벌어졌다. 3개의 교실을 터서 숯불 위에 고기를 구웠다. 200명의 아티스트, 학교 관계자, 재일동포들이 함께 하는 거대한 파티였다. 이 자리는 높고, 낮음, 일본인, 한국인, 재일조선인을 구분하지 않는 평등한 식탁, 평등한 불판 위에서 고기를 굽고 나누었다. 이렇게 만난 한/일 예술가들은 ‘아티스트 액션’이라는 그룹도 만들었고, 올여름에는 참여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자료집도 출간했다.

 

그의 행동은 조선학교뿐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20여 년이 넘는 그의 취재와 작품 활동은 일본 지원단체의 요청으로 송신도 할머니와 일본인 활동가들이 벌인 일본법정투쟁 이야기를 담은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실렸다. 그가 만든 ‘침묵의 외침’이라는 사진과 비디오 영상은 2007년도 에스토니아와 핀란드에서 열린 <디버스 유니버스> 페스티벌에서 상영되어 많은 외국인 관람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페스티벌에 참여한 독일예술가의 즉흥 퍼포먼스도 이어졌다. 같은 제목의 ‘침묵의 외침’이라는 전시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기록한 사진가들과 신문사의 사진들을 모아 2012년부터 용산구청 대전시실의 전시를 첫 시작으로 서울시 여러 곳과 통영을 돌았다.

 

안해룡은 멈추지 않는다. 큰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단지 계속할 뿐이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일본 내의 조선인과 함께하는 멈추지 않는 행동. 안해룡이 멈추지 않기에, 우리는 안해룡과 함께 우리 속의 ‘타자’인 그들을 만날 수 있다. 그가 만들어 가는 사건적 행동은 분명 우리 안에 있는 것이지만, 없는 것으로 여길 때 훨씬 마음이 편한 존재들인 재일조선인커뮤니티를 대면하게 한다. 가끔 신문이나 뉴스에서 만날 때만 그들을 기억할 뿐, 또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존재들. 아니 잊히는 것이 속 편한 존재들. 그러나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존재들을 현재에 소환해서 우리 앞에 데려다 놓고, 그들과 맨얼굴로 대화하기를 촉구하는 것이 안해룡의 작업이다. 우리가 안해룡이 제안하는 불편하고 불안한 대면에 어떠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한국과 일본, 일본 속의 조선을 넘나들며 재일조선인커뮤니티와 함께 만들어 가는 ‘집단적 예술의 실천’은 우리의 고정된 사유방식을 뒤흔들며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