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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47호(2013.12)

[연간기획] 불온한 고전_ 안민영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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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기획] 불온한 고전_ 안민영은 사라지지 않았다

 

글 : 강명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hkmk@pusan.ac.kr

 

 

 

 

안민영(安玟英, 1817-?)이란 사람이 있다. 박효관(朴孝寬)과 󰡔가곡원류(歌曲源流)󰡕라는 가집을 엮은 사람이다. 󰡔가곡원류󰡕는 김천택의 󰡔청구영언󰡕, 김수장의 󰡔해동가요󰡕와 함께 조선의 3대 가집의 하나로 꼽는다. 19세기에 가장 인기 있는 가집이었던지 지금까지도 수많은 필사 이본(異本)이 남아 있다. 또 지금 국악의 가곡창(歌曲唱)은 󰡔가곡원류󰡕가 전한 바라고 하니, 이래저래 안민영은 박효관과 함께 19세기 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안민영은 경기도 광주 출신이라고 한다. 이것 외에 밝혀진 바는 거의 없다. 정확한 신분이며, 가계도 알 수가 없다. 다만 그의 스승이었던 박효관은 여러 문헌으로 서리 신분층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또 산 곳도 서리들이 많이 살았던 서울 서촌(西村)이었다(현재 서촌 필운대 아래 석벽에는 박효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박효관의 신분으로 보아, 제자 안민영 역시 그와 별 차이가 없는 신분이었을 것이다.

󰡔가곡원류󰡕와는 별도로 안민영은 자신이 지181수 시조를 모아 󰡔금옥총부(金玉叢部)󰡕란 책으로 엮었다. 역시 가곡창을 위한 가사집이다. 그런데 작품 아래에 이따금 창작에 관련된 이야기를 적지 않게 밝혀 놓아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한데, 그 이야기의 졸가리는 어떤 사람(대개 음악인이다)과 어떻게 만나 신나게 놀았다는 이야기거나, 어떤 기녀와 어떻게 만나 즐겁게 지냈다는 이야기다. 특히 후자가 대단히 상세하다. 소개하자면 대개 이러하다.


안민영은 통영, 전주, 동래, 진주, 남원, 평양, 해주, 평양, 밀양 등에서 이름난 기생이 있으면 반드시 ‘머물렀다.’ 머물렀다고 하는 것은 곧 그 기생의 집에서 머무르며 성관계를 가졌던 것이다. 그 수가 얼마나 많았던지 그 스스로 ‘명기를 수없이 겪어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한다. 부산 쪽을 찾아보자. 그는 동래부에 머무를 때면 동래 기생 청옥(靑玉)의 집을 숙소로 삼아 즐거운 때를 보내곤 했다고 한다. 물론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자신이 내심 노리고 있던 함양 기생 연화(蓮花)를 운봉 현감이 먼저 차지하자, 안민영은 ‘가증스럽다’고 속내를 토로했으니, 이 오입쟁이도 실패할 때가 있었던 것이다.


안민영은 진주에 갔다가 중풍, 곧 뇌졸중에 걸렸다. 약을 썼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의원이 온천욕을 하면 효험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자, 그는 동래 온천으로 간다. 동래로 가던 중 창원에 들렀더니, 기생 경패(瓊貝)가 춤과 노래로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오입쟁이 안민영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경패를 찾아가 만났다. 하지만 중풍이 든 몸이라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아쉽지만 동래로 가는 수밖에. 온천에서 스무 하루를 목욕을 한 것이 효험이 있었는지 몸이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안민영은 즉시 창원으로 갔다. 경패의 집에서 머무르며 ‘전날의 미진한 정’을 푼 것은 물론이다.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경패’만이 있었을 것이다.


1867년 쉰 둘의 나이에 안민영은 대원군을 만난다. 어떤 계기로 만났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후 대원군에게 퍽이나 신임을 받았던 것 같다. 그렇다 해서 그가 특정한 관청의 업무를 맡은 것은 아니었다. 󰡔금옥총부󰡕를 훑어보건대 그는 대원군의 잔치에 기녀와 악공을 대령하는 구실을 맡았던 것 같다. 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대원군이 권력의 절정기에 있을 때 여성을 상납하는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은 그런 안민영이 예쁘게 보였던지 ‘구포동인(口圃洞人)’이란 호를 내려 주었다. ‘구포(口圃)’는 서울 삼계동(三溪洞)에 있던 안민영의 집 후원에 ‘口’ 자 모양의 밭이 있다고 해서 붙인 것이었다. 삼계동에는 대원군이 휴식을 하는 정자가 있었으니, 대원군 역시 안민영의 집을 잘 아는 터수였던 것이다. 안민영이 회갑을 맞자 대원군은 기녀와 악공을 불러다 한바탕 질펀한 잔치도 벌이게 해 주었다.


이처럼 당대 최고 권력자인 대원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니, 안민영이 그를 찬미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병인양요를 두고, 안민영은 이렇게 말한다. “병인년 서양 오랑캐의 난리는 석파대로(石坡大老, 대원군)의 영풍웅략(英風雄略)이 아니었으면 누가 척사위정(斥邪衛正)을 했겠는가?” 병인양요란 전대미문의 사건을 오직 대원군이 영웅적 역량으로 해결했다고 말한다. 다른 시각은 없다. 그에 의하면 ‘국태공(國太公)은 만고의 영걸(英傑)’이었다.


안민영이 호색하는 오입쟁이로 그냥 그렇게 살았다면, 그리 탓할 것도 없다. 그런 호색한은 19세기에 널리고 널렸을 테니까 말이다. 아니 성이야말로 예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 않는가. 구스타프 클림트나 파블로 피카소를 들 것까지도 없다. 예술사의 한 페이지만 들추더라도 성을 예술로 승화시킨 예술가는 허다하다. 옹졸하게 예술가에게 도덕의 족쇄를 채우고 싶지도 않다. 한데, 안민영의 예술, 곧 그의 시조에 성이 어떤 예술적 영감을 가져다 준 것 같지도 않다. 그의 작품은 그냥 범상한 언어의 나열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형식에 관한 진지한 고민도 없다.


19세기 조선사회는 치료 불가능한 병증을 앓고 있었고, 대문 밖에는 서양 제국주의의 함포가 요란했다. 안민영은 그런 사회와 시대에 관한 고민이라고는 없었다. 그에게 19세기란 전대미문의 시대는 태평성대였던 것이다. 왜인가? 그는 권력자에게 아부로 일관한 인간이었다. 그에게서 권력에 빌붙은, 색정에 환장한, 고민 없는 예술가의 말로를 보는 듯하다.


안민영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고민은 한 점 없고 오직 ‘예술’만 하는 사람, 예술보다는 예술가인 체하는 하는 놀이에 몰두하는 사람, 늘 권력 주변을 서성이며 권력의 나팔수가 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또는 예술을 돈벌이로 아는 그런 사람 말이다. 안민영과 김성기(金聖基)를 구분하는 안목이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