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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어떻노 부산 살피기] 시읽기 사람읽기 _ 다른것은 다른거고
글: 윤지영(동의대 국문학과 교수) windnamu@hanmail.net
일러스트: 방정아 artbang1@hanmail.net
철이 들고부터 제법 심각하게 고민해온 문제가 있다. 그 문제는 여전히 명쾌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날수록 새끼만 치고 있다.
고민은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에서 시작했다. 아마도 대학생 때 그런 고민을 처음 했던 것 같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기 시작한 게 서울로 대학을 간 후부터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그전에는 지하철이 없는 곳에서 학교를 다녔고, 그보다 더 전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일이 별로 없었다. 서울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구걸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놀랐다. 코흘리개를 앞세우고 등에 애를 업은 여인이 다음 객차로 사라지자마자, 뒤를 이어 검은 안경을 쓰고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카세트를 목에 건 남자가 지팡이로 앞을 더듬으며 등장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해 보이는 소년이 연신 굽씬거리며 앉아 있는 승객들의 무릎 위에 구구절절 사연이 적힌 종이쪼가리를 떨어뜨리고 지나갔다. 그중 가장 끔찍했던 것은 두 다리가 잘려 아예 바닥을 기며 구걸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개중에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잔돈을 건네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눈을 감은 채 그 종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그 중간이었다. 괜한 죄책감과 불쾌감을 애써 누르며 종이에 적힌 사연을 읽고 종이의 주인에게 건네주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한편으로는 나는 내 자신이 그들을 완전히 무시할 만큼 비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선뜻 돈을 건네줄 만큼 어리숙해 보이기도 싫었다. 그들을 도와주는 게 결코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제법 합리적인 반론에서부터 그들이 사실은 거대한 조직을 이루고 있어서 그렇게 모은 돈을 두목에게 가져다주고, 구걸을 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불구로 만든다는 식의 괴담도 들은 적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내내 무뎌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들에게 동전 한 푼 건네지도 못하며 내 손으로 그들의 손에 종이를 건네주는 것으로 죄책감과 불쾌감의 긴장을 견뎠다.
대학 때 빈민 활동, 농촌봉사활동, 그리고 나환자촌 봉사활동을 다니면서도 내 고민은 여전히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활동을 위한 사전 교육에서 우리는 결코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며, 그들과 우리는 동등한 인격과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삶에 대해 배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들었지만, 철거깡패와 맞서 머리 산발하고 울부짖는 아줌마들 앞에서, 반갑다고 내미는 뭉그러진 손 앞에서, 시큼털털한 땀 냄새 앞에서 나는 언제나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과연 저들과 똑같은가, 그렇다면 어째서 나는 저의 손을 덥석 붙잡지 못하는가, 내가 저들과 똑같다고 하는데 나는 어째서 이 공동 화장실이 끔찍해서 활동 내내 화장실을 못 가고 변비에 걸리는 건가, 내가 그들과 똑같다고 하는데 어째서 나는 그들 앞에서 해도 되는 얘기가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얘기가 있다고 여기는 걸까, 어쩌면 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건 아닐까. 그들과 내가 같다는 당위 앞에서, 아무래도 그들이 다르게만 느껴지는 자신에게 당황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닌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행동하는 내가 위선적인 것만 같고, 여하튼 그렇게 복잡하고 분열적인 생각들을 품은 채, 어른이 되면 정리가 될 거라 믿으며 혹은 자신을 속이며 한참을 헤맸던 것 같다.
하지만 웬걸. 그 문제는 시간이 지난다고, 어른이 된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 문제에 대해 나름의 대답을 찾게 된 건 그와 비슷한 경험들의 반복과 인문학 덕분이다. 그렇다고 이제는 내가 나와 다른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불편함을 느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두려움과 불편함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자유와 더불어 근대적 시민의 조건이자 권리로 천명된 평등과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 정신이 어디까지나 이상일 뿐임을 이제는 안다.
그런데 나와 다른 존재들이 어디 그와 같은 소수자들뿐인가. 우리 각자는 얼마나 서로 다 다르고 서로가 낯선가. 익숙해지기 전에는 말이다. 익숙해지기. 결국,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처음의 두려움과 거부감은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점점 사라졌다. 함께 일하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나와는 다른 그들의 생김새도, 그들의 말투도, 그들의 공간도 보이지 않고 오직 하나만 남는다. ‘아, 이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구나.’ 이 얼마나 당연한 사실인가. 그들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면 도대체 뭐였단 말인가. 그러나 내가 그토록 곤혹스러웠던 것은 당연한 그 사실이 전혀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기가 지나면 또 다른 낯섦과 차이가 보일 것이다. 똑같은 사람이 성격도, 욕망도, 습관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 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적인 차이를 발견하기도 이전에 사회적 관습에 따른 차이에 갇혀 나와 다른 것을 내 영역에서 밀어낸다. 어쩌면 그것은 생존을 위한 동물적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 동물적인 본능에만 몸을 맡길 때 우리는 정체 모를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그 불안과 공포의 정체를 바로 알 때 우리는 평등과 박애라는 이상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다른 것이 싫고 불편한 것은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다. 비윤리적인 것은 싫고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동물적 직관으로부터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첫걸음은 나와 같은 무리로부터 떠나 나와 다른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별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인문학의 세계에 빠지는 방법도 있다. 깊어 가는 가을, 인문고전을 손에 들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