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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43호(2013.04)

[우린어떻노 부산살피기] 손바닥 소설 : 야구장에선 하나도 안 늠름한 이병욱씨를 쫌!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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늠름 병욱 시리즈 ‘부산병’ 특집Ⅱ

< 야구장에선 하나도 안 늠름한 이병욱 씨를 쫌! 보라 >


글 : 배길남(소설가) rakesku@hanmail.net

일러스트 : 전진경 wjswlswls@naver.com




- 부산시민이 롯데 야구를 통해 자신이 특정한 지역공동체에 속하고 있음을 경험하고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죠. 그런데, '부산 싸나이'들이 '우리가 남이가'하는 폭력적인 형태로 단일한 정체성을 구축하는 것은 문제라고 봐요.

『국제신문』특집 <부산사람, 비밀코드 2> 中에서



오늘도 사직야구장은 사람들로 미어터집니다. 티켓 매표소의 줄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행님, 조만간 한 번 오이소. 예매? 뭐, 그런 거 필요 없습니더. 1루는 아이라도 외야는 공짜로 들이 보내 줄게예. 뭐, 우리가 남입니꺼?”

철떡같이 믿고 온 야구장의 00카드 창구의 아는 동생은 아무리 전화해도 받지를 않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큰소리를 쳤던 이병욱 씨의 체면은 이미 땅에 떨어진 지 오래입니다. 


약속시간보다 늦게 온 김철수 씨가 눈치 없이 떠들기 시작합니다.

“와아~! 예매 안 되더나? 뭐 이리 사람이 많노?”

이병욱 씨의 인상이 다시 한 번 찌푸려집니다. 옆에 있는 여자 친구 홍미선 씨의 한숨 소리가 분명히 귀에 들렸기 때문입니다. 철수 씨가 오기 전, 이 커플은 벌써 한바탕 전쟁을 치렀습니다. 병욱 씨는 이미 ‘공수표인 사람’에다‘준비성 없는 사람’에다 ‘욱하는 성격의 사람’이 되어 있는 중 입니다. 한숨을 내쉬는데 줄이 앞으로 조금 나아갑니다.

“어어?”

내려놓아둔 봉지를 들던 병욱 씨가 중심을 잃습니다. 벌어진 줄 사이로 “죄송합니다.” 하고 지나가던 커플이 병욱 씨의 어깨와 부딪친 것입니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봉지 안의 소주팩이 우루루 나뒹굽니다. 얼굴이 벌게져 얼른 줍는데 철수 씨의 주무기인 ‘눈치 하나도 없기’2연타가 작렬합니다.

“그거는 또 뭐꼬? 표는 안 끊고 소주는 사가 뭐하노? 참, 내….”

뒤통수에서 김이 나던 병욱 씨가 결국 참지 못하고 퍼엉 터져버립니다.

“마! 입 닥치라. 짜증나게 할라믄 꺼지라이!”

철수 씨가 깜짝 놀라 입을 다물고 주변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봅니다.

“오빠, 무서워….”

LG유니폼을 입고 있던 커플이 주운 소주팩을 얼른 건네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납니다.

“오빠아, 와 그라는데? 말하는 거 봐라…. 친구한테 무슨 말을 그리 하노?”

미선 씨가 병욱 씨를 잡아당기자 병욱 씨의 얼굴이 더욱 벌게집니다. 그는 이제 ‘말이 거친 사람’도 되었군요.


표를 끊고 관중석에 온 세 사람은 밀려 밀려 외야석까지 왔습니다.

“이 봐라, 이 봐라. WBC는 개박살 나도 롯데는 멀쩡한 기라. 부산에 뭐 할 끼 없으이까 전부 야구장으로 안 밀리오나? 맞지요, 미선 씨?”

눈치를 보던 철수 씨가 능글맞게 말을 건네자 미선 씨도 눈치를 보며 “아, 예에….”하고 대답합니다. 두 사람이 눈치를 보는 것은 바로 오늘의 주인공 이병욱 씨 때문입니다. 그는 야구장 입구의 가방검사에서 가진 소주를 몽땅 뺏긴 상태입니다. 병욱 씨는 이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습니다. 뭔가 꼬투리를 잡을 게 없던 병욱 씨가 옳다구나! 하며 “할 거 많은 니는 딴 데로 꺼지면 될 거 아이가?”하고 막말을 준비하는데 철수 씨가 팩소주 두 개를 눈앞에 들이밉니다.

“후후…, 사실은 내도 좀 들고 왔다 아이가? 여기 족발하고 미선 씨 좋아하는 순대도 있데이.”

철수 씨의 가방에서 보물들이 쏟아집니다. 병욱 씨의 입이 조금씩 벌어집니다. 순간 와아!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롯데 선수 강민호가 안타를 쳤습니다.

“와아아! 와아아! 롯데에 강민호, 강민호! 롯데에 강민호…. 오오오오.”

병욱 씨가 일어서 미친 사람처럼 노래를 따라 부릅니다. 아아, 모든 스트레스가 순식간에 날아가는 듯합니다. 봄의 기운을 드디어 만끽하는 이병욱 씨입니다.


때는 7회말, 게임 스코어는 6대0. 물론 롯데가 열심히 지고 있는 중입니다. 하품을 하던 홍미선 씨가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오빠, 롯데는 자이언츠 아이가? 그런데 로고는 왜 갈매긴데?”

이번에는 술기운에 얼굴이 벌게진 이병욱 씨가 고개도 안 돌리고 대답합니다.

“롯데는 부산이니까 갈매기지.”

“롯데가 왜 부산인데? 말도 안 된다. 그럼 백화점에서 돈 번 것도 전부 부산으로 오나?”

“아이씨, 야구하고 그런 거 하고 같나?”

“오빠, 말투가 왜 그런데? 오늘 평소하고 너무 다르다. 야구장 와서 그라나?”

“내가 뭐…!”

“미선씨, 야아가 야구에 집중해서 안 그랍니까? 이해 하이소.”

김철수 씨가 얼른 병욱 씨의 입을 막고 중재에 나섭니다. 이병욱 씨가 손을 치우고 한마디 하려는데 운동장 전체에 “마!”가 울립니다. 


LG 투수가 견제구를 던진 모양입니다. 그때 3루 측에서 “왜?”하는 소리가 잠시 났다 멈춥니다. 갑자기 운동장이 시끄러워집니다.

“죽을라꼬 그라나?”

“여어가 어데라고 설치노!”

여기저기서 욕설이 난무하는 것이 거의 데모 수준입니다. 할 말을 못하고 씩씩대던 병욱 씨도 덩달아 욕설을 퍼붓습니다.

“맞다. 아까 내 치고 간 것들도 LG 옷 입고 있었제? 다 잡아 직이뿔라! 그 XX의 XX 때문에…, @#$%$^&$& !!!”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튀어나오자 미선 씨가 기가 차다는 아예 외면하다 급히 병욱 씨를 잡아당깁니다. 철수 씨도 아까처럼 얼른 입을 막습니다.

“와 자꾸 입을 막고 그라….”

반항하는 병욱 씨의 귀에 아까 잠시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옵니다.

“오빠, 무서워….”

놀라서 돌아보니 계단에 아까의 LG 커플이 서 있고, 남자가 병욱 씨를 뚫어질 듯 노려보고 있습니다. 막상 앞에 있으니 할 말은 없고, 갑자기 무안해집니다. 여자는 정말 겁에 질린 것 같군요.


집에 오는 길은 상당히 씁쓸합니다. 버스에 혼자 탄 이병욱 씨. 그의 머리를 맴도는 세 가지 말이 그를 더욱 씁쓸하게 합니다.

첫째, 미선 씨.

“오빠, 나 오늘 그냥 집에 갈게. 잡지마. 오늘은 정말 같이 있는 게 싫다. 놔!”

둘째, 철수 씨.

“나도 그냥 갈게. 임마, 오늘 니 좀 심했다.”

셋째, 익명의 LG 씨.

“부산에 오더라도 다시는 야구장에 오지 말자. 여기 사람들 이상해.”


버스는 계속 달립니다. ‘공수표인 사람’에다‘준비성 없는 사람’에다‘욱하는 성격의 사람’에다 ‘말이 거친 사람’에다 ‘조폭패거리 같은 부산 사람’까지 된 오늘의 이병욱 씨가 한숨을 내쉽니다. 그의 중얼거림이 여기까지 들려오는군요.

“아, 진짜…. 쫌!”

정말 ‘아, 진짜…, 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