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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43호(2013.04)

[느그괘안나 네트워크] 장영식의 사람이 한울이다 : 기타를쳐라.공장을 돌려라. / 4월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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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식의 사람이 한울이다 : 기타를쳐라.공장을 돌려라. / 4월이 오면



글·사진 : 장영식 paxraphael@naver.com

기획 : 웹진 룰루랄라 www.kpaf.kr



"기타를 쳐라.  공장을 돌려라"

  인천 갈산1동 콜트악기 부평공장을 들어서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그려진 숱한 기타들과 "인간"이라는 글귀이다. 
이 사진의 자리가 바로 2007년 12월 11일 밤 11시, 
천막농성장 앞에서 부당해고 철회를 촉구하며 이동호(49ㆍ계양구 작전동)씨가 분신했던 그 장소이다. 
이동호 동지는 왼손 검지와 중지가 다른 사람보다 짧다. 
콜트악기는 그의 몸에 화상을 남기기 전부터 손가락부터 빼앗아갔다.
2007년 회사의 일방적 통고로 시작된 정리해고의 광풍으로 
콜트악기를 생산하는 콜트악기 부평공장과 콜텍 대전공장의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되고, 공장은 폐쇄됐다. 
이들이 일하던 공장의 주요 설비들은 인도네시아와 중국에 세워진 공장으로 옮겨졌다. 
이 공장들에서 생산되는 악기들로 1000억대 자산가로 성장한 박영호 사장은 
노동자를 내쫒고, 콜트를 위장 매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 돈을 벌고 있다.
그는 방배동에 500~600평의 대지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50만원으로 시작해서 지금의 콜트와 콜텍을 이룬 것은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이룬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자신의 청춘을 바쳐 일군 삶의 터에서 거리로 쫒겨나는 것이 현실이다. 
국민의 정부에 이어 참여정부가 정리해고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받아들인 결과이다. 
지금도 콜트악기로 인해 손가락 두 개가 잘리고 몸에 화상까지 입은 이동호 동지를 비롯,  
콜트의 모든 동지들은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한다. 
박영호 콜트악기 사장이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여 해고자를 복직시키고, 
공장을 정상화시킨다면 다시 자신들의 삶 그 자체인 공장으로 돌아가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기타를 만들며, 삶을 노래하겠다"라는 노동자들의 소박한 소망이 
꽃피우는 그 날까지 더욱 단결하고 더욱 연대하자. 
단결과 연대만이 우리의 무기요 힘임을 잊지 말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4월이 오면"


  4월입니다. 4월이 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제주 4.3항쟁입니다. 

4월이 오면 진달래 꽃잎처럼 쓰러져갔던 4.3항쟁의 피맺힌 원혼들이 되살아납니다. 

예로부터 제주의 여인들은 강인했습니다. 제주의 여인들은 한 많은 이 가난한 땅의 역사입니다. 

제주의 여인들은 남성이 없어도 그들 스스로 완전한 인간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농부이며 해녀이자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완전하게 추구했습니다. 

땅의 사람으로서 제주의 여인들은 애기구덕을 발로 흔들며 손으로 밭을 갈았습니다. 

까마득한 바다 속으로 자맥질을 하며 바당밭을 개척해왔던 이 땅의 어머니입니다. 

4.3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949년 1월, 지금의 평화공원 서북쪽인 용강, 봉개, 삼양 등지에서 하루에만 105명이 몰살당했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행된 학살로 이 마을은 토산리 학살과 함께 송두리째 한 세대가 몰살됩니다. 

토벌군의 학살이 있은 후일, 지나가는 행인에 의해 눈더미 속에서 총상을 입고 시신으로 발견된 모녀는 당시 25세였던 변병생 님과 두살박이 딸이었습니다. 이 시신을 발견할 당시 젊은 어머니가 토벌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휘날리는 눈밭에 딸을 안고 쓰러져  숨을 거두면서도 어린 딸의 귓가에 다음과 같이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웡이자랑 자랑자랑

우리애기 잘도잠쩌

자랑자랑 자랑자랑 웡이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