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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43호(2013.04)

[느그괘안나 네트워크]수원 골목잡지 사이다_수원의 무예 2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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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위한 실학의 사상이 담긴

수원의 무예 24기


글,사진 : 수원 골목잡지 사이다_ 최종혁 (storm76@hanmail.net)




   선이 주는 아름다움을 한국적인 것에서 찾는다면 너무 넘치지도, 못 미치지도 않게 미끄러져 내려가는 아릿한 선의 넘김을 주는 버선이 연상된다. 치맛단아래 수줍은 듯 내미는 버선발의 아름다움은 뒤축에서 앞부리로 이어져 버선코에서 삐죽 솟아 올라가는 작은 도발의 곡선에서 나온다. 다소곳 한듯 하지만 요염한 자태로 도발하는 절묘한 조합은 절도와 변화의 미학이다.

드러내지 않는 듯 드러내 보이는 절도와 변화의 솟구침이 어울려지는 선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무예에서도 찾아 볼수 있다. 갑주를 하고 쌍검을 휘두르는 무예24기의 검사가 뿜어내는 검무를 본다. 검과 하나가 된듯한 무사의 춤사위에는 강하다는 표현이 그대로인 절도와 부드럽게 흐르는 물과같이 잔잔하면서도 휘몰아 치는 선을 그려 내고 있다.


   조선의 검은 짧다. 그만큼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 조선의 검무다. 짧고 가볍기에 더욱 역동적인 동작이 가능하고 정확성이 요구되어진다. 순간의 허점을 노리는 대담한 보법, 파괴력을 높이는 회전동작, 급소를 노리는 세밀한 공격, 신속하게 치고 빠지는 연속찌르기, ‘투로’라고 표현되는 연속동작의 결합. 이러한 조선검의 검무를 경험할수 있는 곳이 수원이다.


   수원은 조선의 22대 정조대왕의 이상이 깃든 도시다. 정조는 즉위 13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 매봉산에서 수원 화산에 현릉원을 조성하여 옮긴다. 이를 계기로 정조는 수원에 화성을 건설한다. 건축과정에서부터 실사구시의 실학이념에 바탕을 두고 과학적인 형식과 방법이 동원되었다. 실학자인 정약용등 젊고 진보적인 인사에게 주도하게 하였고 이때 만들어 사용한 것이 지렛대 역할을 하는 거중기다. 이러한 이유로 수원화성은 즉위 18년에 시작하여 2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완성되었다. 정조는 화성을 단순한 군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성곽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자신이 펼치고자하는 이상정치를 실현하는 실체로서 화성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수원의 화성은 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평산성의 형태를 띤다. 전쟁이나 유사시에도 산성으로 도피하지 않고 백성들의 생활공간에서 적을 물리칠수 있는 유일한 성곽이다. 그만큼이나 수원화성은 다양한 기능과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외관상으로도 수원화성은 팔달문, 장안문, 창룡문, 화서문이 동서 남북으로 버티고 성곽을 따라 다양한 기능의 건축물이 배치되어있다. 현대의 도시와 옛성의 정치를 규모있게 아울러서 접할수 있는 곳이 수원이다. 이렇듯 정조의 이상은 세월을 넘어 화성에 담겨져있다.


   정조의 이상이 건축물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 수원 화성이라면 무형의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 무예24기다. 정조는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군사개혁을 시도한다. 장용영은 새로운 금위체제에 따라 조직, 개편한 정조의 호위군대로 만들어졌다. 더 나아가 장용영을 통해 비대해져 병폐가 많았던 군사조직을 정예화 시켜 개혁 하고자하였다.

정조는 즉위하던 1776년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완성한 18가지 기예와 더불어 마상무예 4기를 군사들에게 적극적으로 훈련토록 지시하였다. 또한 이들 기예들을 1785년부터는 무사를 선발하는 시험과목으로 규정하였으며, 1790년에 기마군의 훈련강화를 위해 마상재와 격구를 추가하여 24가지의 기예를 그가 창설을 주도한 최정예의 군부대인 장용영에서 편찬하게 하고 책이름을 <무예도보통지>라 명했다.

장용영의 군영은 한양에 주둔하는 내영과 수원 화성에 주둔하는 외영으로 나누어져있었다. 이처럼 당시 최고의 무예가 수련된 곳이 장용영이었으며, 수원 화성은 장용영 외영의 존재로 무예24기가 가장 활발하게 수련되고 펼쳐졌던 공간이었다.

조선 군사들의 함성이 울려 퍼지던 자리에 메아리처럼 갑주를 입은 병사들의 기합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무예24기보존회의 시범단이 수원 화성에 군영을 두고 있다.

수원시는 2005년부터 무예24기보존회의 시연을 상설공연으로 진행하고 있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 까지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에서 오전 11시와 3시 두 차례의 공연이 진행된다.


   신풍루 앞은 커다란 광장이 조성되어있다. 공연을 알리는 음악이 울려퍼지면 광장을 거닐던 사람들이 모여든다. 저음의 북소리가 깔리는 음악은 다음에 이어질 공연의 무게를 만들어 주고 갑주를 입은 시범단은 하나씩 나와 활쏘기를 선보인다. 오프닝으로 활쏘기를 마치고 갑주를 입은 시범단원들이 병기를 들고 나오는 모습에서 화려함과 과거 군사들의 위용을 엿본다.

공연은 장창, 기창, 낭선같은 찌르는 무기의 시연을 시작으로 베는 무기인 제독검, 본국검, 쌍검등의 시범을 거쳐 권법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오랫동안의 수련을 바탕으로 하는 시범단의 공연은 실전을 벌이는 듯한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축성하면서 백성들에게 노임을 충분히 주었다. 군사조직을 개편하면서도 국방비감축을 통해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자주국방과 왕권강화의 정책이 백성들을 위하지 않는다면 고통의 역사요 지탄받아야 할 역사다. 수원화성은 건축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뛰어난 한국의 문화유산이다. 더불어 정조의 백성을 위한 정치적 이상을 담은 이야기가 살아있는 현장이다.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무형의 자산이 무예24기다. <무예도보통지>편집자인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가 정조 임금께 올린 글에 “그리하여 조정은 실용 있는 정책을 강론하고, 백성은 실용 있는 직업을 지키고, 학자들은 실용 있는 책을 펴내고, 무사들은 실용 있는 기예를 익히고, 상인들은 실용 있는 상품을 유통시키고, 장인들은 실용 있는 기구를 만든다면, 어찌 나라를 지키는 일을 염려하며 어찌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걱정이 있겠습니까?"라는 구절은 무예24기의 바탕이 되는 정신을 말하는 바다.


   한 외국인 자동차 디자이너는 한국 검객의 검무를 통해 영감을 받고 자동차를 디자인 한다고 한다. ‘우리의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명제가 중요함에도 우리는 많은 우리의 것을 잃어가고 있다. 무예24기도 중요한 우리의 것 중 하나다. 그 안에 살아있는 백성을 위하는 정조의 정신이 널리 보급되길 바란다.



* 사이다 : 2007년 4월에 창간한 골목잡지 <사이다>는 팔달산 주변에 사는 주민과 문화단체, 작가, 기획자, 편집디자이너가 힘을 모아 지키고 기록해야 할 삶과 문학, 자연, 공간 등을 담아내고자 합니다. 계간 골목잡지 '사이다'는 무가지로 5천부를 발행하고 있으며 여러 시민이나 재능 나눔과 자발적 후원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