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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42호(2013.02)

[연간기획 상식의 파괴와 전복]불온한 고전 : 예술가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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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자세




글 : 강명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hkmk@pusan.ac.kr




김성기(金聖基)는 영조 때 상의원(尙衣院)의 궁인(弓人)이었다. 상의원이란 원래 왕과 왕비의 의복을 제작하고, 궁내의 값나가는 보물을 관리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왕이 사용하는 활도 만들었던 모양이다. 활을 만드는 장인이었으니, 신분을 따지는 조선사회에서 김성기는 그야말로 밑바닥 인생인 셈이다.

그래서 그랬던지 김성기는 활 만드는 데는 큰 애정이 없었다. 우연히 손에 댄 거문고가 좋아 배우러 다녔다. 배우다 보니 거문고가 나날의 일이 되었다. 급기야 활은 팽개치고 거문고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마침내 거문고의 명인이 되었고, 거문고 좀 뜯는다 하는 장악원 악공도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거문고의 명인은 퉁소도 비파도 명인의 경지에 도달했고, 작곡에도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그가 새로 발표한 곡은 ‘김성기의 신보(新譜)’라고 하며 사람들이 다투어 배워서 연주하였다. 그가 죽고 난 뒤 제자들이 그가 전한 곡조를 따로 거두어 모아 거문고 악보를 내었고, 지금도 <어은보(漁隱譜)>라는 이름으로 전하고 있다. ‘어은(漁隱)’은 김성기의 호다.



김성기의 연주를 들어본 사람은 누구나 김성기를 첫손가락으로 꼽았다. 조선 후기에 서울에서는 잔치를 벌이면 장악원 악공이나 용호영의 악대(樂隊), 그리고 춤추는 기생을 불러 한바탕 노는 것이 풍습이었다. 잔치에 반드시 초청해야할 사람은 김성기였다. 김성기를 못 부르면 잔치도 아니라 할 정도였으니, 김성기의 인기를 알만하지 않은가?

잔치를 벌인 사람은 악공과 기생에게 행하(行下)를 주었다. 연주에 대한 대가였다. 김성기는 이름이 있었으니 받은 행하로 집이며 땅이며 샀을 만도 한데, 사는 것은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살았고, 아내와 아이들도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크게 괘념하지 않았다.


김성기는 늘그막에 마포 근처의 셋집을 얻어 살았다. 작은 고깃배 한척을 사서 고기를 잡아 겨우 생계를 이었다. ‘어은(漁隱)’이란 호는 이 때문에 붙인 것이다. 바람이 잔잔한 날, 달이 훤히 비치는 밤이면, 노를 저어 강심으로 나가 퉁소를 불었다. 맑고 애절한 소리에 강가의 행인이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김성기가 한강에서 물고기를 잡고 퉁소나 불다가 죽었으면, 그는 그저 연주에 빼어났던 음악인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역사의 한켠에 남긴 사건이 있었다. 경종(1720-1724)은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었지만, 몸이 허약한데다 또 장희빈의 아들이라 노론들에게 탐탁한 존재가 아니었다. 부왕 숙종까지 세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숙종은 죽기 3년 전(1717년) 노론 이이명을 불러 세자(경종)를 연잉군(곧 뒤의 영조)으로 바꾸려는 속마음을 밝힌 적이 있었다. 경종이 즉위하자 숙종의 밀명을 받은 노론은 경종이 젊은데도 불구하고, 자식도 없고 병도 많다면서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세워 달라고 경종의 허락을 받아내었고, 얼마 있지 않아 세제가 경종의 옆에서 정무를 배울 것을 허락할 것을 청했다. 사실상 왕을 교체하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숙종 이래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왕위에 올리려는 노론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졌다.


1722년 3월 남인 목호룡(睦虎龍)은 소론의 편을 들어,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거나 폐위할 것을 도모했다고 고변(告變)하였다. 노론의 지도자 4명, 곧 김창집·이이명·조태채·이건명이 사사(賜死)되었고, 연관되어 죽은 사람이 수십 명에 달했다. 귀양을 간 사람 역시 1백 명이 넘었다. 그 외 관련되어 고통을 받은 사람 역시 수백 명이었다. 미심쩍은 구석은 많지만, 노론은 경종을 몰아내고 연잉군을 왕위에 올리고 싶었겠지만, 경종을 자객을 시켜 죽이거나 음식에 독물을 타는 방식으로 일을 추진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소론에게는 그 진위는 상관이 없었다. 당쟁이 늘 그렇듯, 그 목적은 상대방 당파를 정계에서 제거하는 데 있었으니까 말이다. 목호룡 한 사람의 고변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삶이 결딴이 났다.


이 사건이 바로 신임사화다. 목호룡은 고변의 대가로 공신이 되었고 땅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어느 날 목호룡은 제 패거리를 불러 잔치를 벌였다. 김성기를 불러 흥을 돋우고 싶어 안장 갖춘 말 한 필을 종에게 딸려 보냈다. 나름 예를 갖춘 것이었다. 하지만 김성기는 병이 났다며 가지 않았다. 심부름하는 종이 몇 차례나 다시 왔지만, 김성기는 누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종이 “오지 않으면 내 너를 크게 욕보이겠다.”는 목호룡의 협박을 전하자, 김성기는 뜯고 있던 비파를 종 앞에 내던졌다.

“돌아가 목호룡에게 전하거라. 내 나이 칠십이다. 그놈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놈은 고변을 잘한다지. 나 또한 고변을 해 죽여 보아라.” 목호룡은 김성기의 말을 전해 듣고, 기가 꺾여 잔치를 파하고 말았다.


김성기는 고변으로 사람을 죽이고 권세를 누리는 목호룡이 옳은 인간이라고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바였다. 상의원 궁인 출신의 일개 거문고 연주자가 권세 있는 목호룡의 초청에 응하지도 않고, 도리어 목호룡의 아픈 곳을 찌를 수 있었던 용기는 어디서 온 것인가. 자신의 예술에 대한 자부심이 용기의 근거였을 것이다.


김성기는 철저히 비타협적인 인물이다. 가난도 비타협적자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하지만 자기 예술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예술가의 삶의 자세는 어떤 것인가. 권력에 비타협적이고 무언가 불온한 것이 그것이 아닐까? 그것은 김성기처럼 자기 예술에 대한 자부심에서 오는 것일 터이다. 오늘도 아마 진정한 예술가라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