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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42호(2013.02)

[연간기획 상식의 파괴와 전복]실험음악, 기성을 전복시키는 시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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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음악,

기성을 전복시키는 시도 1



글 : 서정민갑(대중음악의견가) bandobyul@hanmail.net



실험과 전복은 예술의 본성 같은 것이다. 기실 거의 모든 문예사조는 기존의 사조에 대한 전복과 실험의 결과가 아니었던가. 이미 기성화된 어법과 논리에 대한 부정과 도전, 모색과 실험이 없었다면 새로운 예술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정선이 진경산수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밥 딜런(Bob Dylan)이 어쿠스틱 기타에 전기를 꽂지 않았다면,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남성용 소변기를 ‘샘’이라고 내놓지 않았다면, 일군의 재즈연주자들이 비밥(Bebop)을 시도하지 않았다면 예술은 그 이전보다 확실히 낡고 지루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예술이 실험과 전복을 감행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혹은 자주 예술은 상투적인 어법을 반복하고, 체제와 영합하며, 자본과 결탁한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어떤 예술은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프로파간다가 되고, 상품화를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기도 한다. 용비어천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고, 후크 송이 이유 없이 비난받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제는 반항과 키치마저 상품이 되는 시대이다. 체 게바라(Che Guevara)가 맥주와 담배 광고에 사용되고, 시위 장면이 의류 제품광고에 나온 지 오래되었다. 저항은 패션이 되었고, 실험은 새로운 상품의 원천이 되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으로 욕망을 자극하며 자본주의는 살아남았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막강하고 교묘했다.


사실 한국에서 실험적이고 전복적인 음악이 펼쳐진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왕조 시대 음악은 공식적으로 주류 이념과 질서를 충실히 하는 교육과 통치의 수단이었다. 물론 민중들의 자발적인 음악은 달랐지만, 구전의 한계는 뚜렷했다. 해방 이후 좌파적인 음악으로 지배 권력과 대결했던 일군의 음악가들은 한국 전쟁 이후 죽거나 북으로 가는 단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그들이 사라진 뒤 남은 음악은 반공의 철벽 앞에서 잠시도 벗어날 수 없었다. 미국에서 건너온 포크 음악의 자유로움마저도 머리 길이를 재고, 치마 길이를 재고, 영어로 된 팀 이름을 우리말로 바꾸라는 명령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기 어려웠다. 그래서 은유가 나오고 상징이 나왔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현재까지의 한국 대중 음악사에서 가장 전복적인 음악은 민중가요와 인디 음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민중가요는 국가 권력에 의해 금기시 된 민주주의와 인권, 평등, 반미, 통일 등을 음악으로 표현하며 체제의 개혁 혹은 새로운 체제의 건설을 호소한 음악이었다. 대학가의 포크 송으로부터 출발했던 초기의 민중가요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목도하며 변혁적 기치를 분명히 했고 한국의 대중음악 속에 멸종되었던 현실성과 사회성, 정치성을 부활시켰다. 1980년대 변혁운동의 성장과 함께 민중가요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90년대 초반 대학과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수많은 민중가요가 생산되고 향유되었으며 재창조되었다. 민중가요는 기존의 주류 음악에 대한 안티테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변혁 운동에 복무하거나 동의하는 이들의 집단적 하위문화이기도 했다. 하지만 민중가요의 정치적 급진성에도 민중가요의 음악적 형식이 가사와 활동의 급진성만큼 급진적이거나 전복적이지는 않았다. 민중가요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예술운동의 형태로 등장하다 보니 대중성과 민중성을 중시했고 그러다 보니 포크와 행진곡, 서정가요 같은 익숙한 음악 양식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민중가요 내부에서도 새로운 음악 양식을 모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그 경우에도 이미 있는 양식을 변형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민중가요는 음악적으로는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편견이 퍼져있기도 했다.


이에 반해 인디 음악은 대중음악의 주류적 제작 방식에 반하는 자립적이고 소규모적이며 대안적인 제작으로 시작하였다. 거대 연예 기획사에서 대자본을 들여 맞춤 제작하는 똑같은 기획 상품으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소자본으로 직접 제작하는 독립적인 제작이 바로 인디의 정체성이었다. 기존의 시장에서 제작할 수 없었던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의 음악이 인디의 틀 안에서 비로소 제작될 수 있었고 그래서 인디는 제작의 방식이 아니라 비주류적인 음악을 통칭하는 것처럼 오해받기도 했다. 실제로 인디 음악에는 기존의 대중음악이 감행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새로운 양식의 실험과 전복이 일상적으로 펼쳐졌다. 대중음악의 장르적 실험뿐만 아니라 민중가요가 표현하지 않았던 다양한 가치와 철학, 라이프 스타일의 표현 역시 인디 음악이 감당했다. 민중가요가 한국 음악의 사회성을 회복하며 국가질서와 싸웠다면 인디 음악은 획일화된 시장과 싸우고 획일화된 어법과 싸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민중음악과 인디 음악이 만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 15년 민주당과 새누리당의 집권을 거치면서 사회적인 문제 때문에 벌어지는 집회 등의 행동에서 문화예술이 담당하는 역할이 매우 늘었고 행동의 언어와 방식 역시 문화예술적 언어와 방식을 사용하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화가 진행된 결과 민중음악 진영 밖의 음악인들 역시 사회적인 의제에 자신의 음악으로 목소리를 내는 일에 이제는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사회적 현장에서 인디 음악인들을 만나는 일은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오히려 과거의 느낌을 주는 민중음악인들보다 인디 음악인들을 더 선호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인디 음악 쪽의 음악인들이 사회적 현장에서 내놓는 음악들은 민중가요처럼 사회적 문제들을 직접 드러내기보다는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고 그와 무관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것은 기존의 민중가요가 만들어온 어법에 익숙하지 않거나, 직접적이거나 상투적이지 않은 다른 어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식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과거와는 다른 음악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민중가요와 풍부한 음악 언어를 지닌 인디 음악이 서로의 특징과 장점을 더 깊이 이해하면서 기존의 권력과 예술 사조를 뛰어넘는 파괴와 전복을 함께 펼쳐보면 어떨까? 실제로 최근에는 민중가요 음악인들이 무너져버린 대학과 노동조합의 공간 대신 클럽을 찾는 경우도 적지 않고 그들 역시 새로운 어법을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인디 음악인들도 사회적 현장에 자주 참여하다 보니 양쪽의 음악인들이 곳곳에서 자주 마주치고 있다. 또한, 싸움은 외부의 싸움에 음악으로 연대하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음악 산업 내부의 불합리한 관행과 제도로까지 번지고 있다. 음악의 기반과 음악 언어, 그리고 음악 바깥에서 싸움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현장에서 스스로 전복자가 되고 있는 음악인들과 그들의 작품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