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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녁들 가심 소곱에 봄바람 맞읍서


탐라국 입춘굿(춘경굿)

2월 2일 ~ 2월 4일 _ 제주 목관아 내, 관덕정 마당 일대



글 : 조혜지(학생) esc2277@naver.com

사진 : 이장수 leeseeda@naver.com




“아니, 이건 빼고 나눠주라고. 제주도민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거든? 이 행사 누가 주최하는건 줄 알아요? (팸플릿 펼쳐 보이며) 봐봐, 여기도 나와 있잖아. 제주시. 이건 나눠 주지 마요.” 그가 약간 우악스러운 손짓으로 테이블 위의 한 뭉치 전단을 구석으로 밀어 붙였다. “네, 네.” 일단 웃으며 수긍했다.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아예 내려놓으라고. 응?” 부드러운 톤으로 어조를 바꾼 그가 다시 객석으로 돌아갔다. 굳이 가슴팍에 명찰을 달지 않아도, 흔한 명함 하나 건네받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를 약간 길게 요약해 설명하자면 ‘제주 강정 해군기지 설치에 큰 이견 없는 레드테이프의 한 축’이었다. 끌어내려진 팸플릿은 강정의 이야기를 담은 소식지였다.


탐라국 입춘굿. 하루는 텐트치고 간판 걸고 전단지 나눠주는 자봉 놀이로, 또 하루는 여기저기 쏘다니고 물으며 받아 적는 기자놀이로 꼬박 이틀을 축제 곳곳에 스며들어 놀멍 일하멍 지냈다. 2월 4일, 입춘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육지에는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고 제주도 만만찮게 추웠다. 거기다 ‘강정’ 소리에 낯을 붉히는 몇몇과 마주치면서 마음도 함께 추워졌다. 입춘. 봄이라. 정말 제주에 봄이 오긴 오는 걸까?


자청비가 오곡씨 가지고 오멍 다들 잘 봅서,

막 재미나낸.

마당에 오른 큰무당이 푸른 치맛자락 공손히 앞으로 모두고 연신 종을 울려 댄다. 충분하다 싶을 즈음 종소리를 멈추고 사방(四方)에 차례로 합장하며 연거푸 절한다. 봄 들어오는 길목이다. 청, 홍, 황, 흑, 백의 광명 자락들이 한 솟

대로 모아 묶인 채 바람 부는 대로 휘청휘청 나부끼고 제주의 동과 서를 각각 지킨다는 하르방이 근엄하게 무대 상석에 앉아 있다. 무대 왼편엔 봄맞이하러나왔다가 덤으로 얻은 굿판 구경에 신이 난 관객들이 질서없이 흩어져 있고

그 반대편엔 각자 놀음판을 기다리는 무당들이 차례로 대기 중이다.


만물의 영장 인간이로되

일월정신 조럼하고 초목은 상생허고

오늘 입춘 한 시 사십오 분에 옥황 도성문이 열리넝

열두소망 한라산을 가운데 중심두엉

저 바당(바다) 물속 물질하는 조흔 조손덜

저 배다 바다에 괴기 낚는 조손덜

크게 사업하는 조손덜

여겅 골목 곳곳 장사하넝 조손덜

오늘 오곡씨를 잘 뿌리졍

전복 오분재기를 땡기졍

수면 양말을 신은 둥근 발이 장단에 맞춰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른다.


고픈 일이거들랑 저 바당(바다)에 건너가게 해줍서

큰 무당 옆에서 이것저것 수발들던 소무(작은 무당)가 찰찰 넘치는 물 한 그릇을 객석 군데군데 흩어 뿌린다. ‘새 림’. 본격적인 굿이 시작하기 전에 굿판의 부정을 씻는 의식이란다. 벌겋게 언 손을 살얼음 낀 대접에 푹 찍어 멀리멀

리 뿌려댄다.


제상 위에 밥그릇은 왜 열 개나 올린 거에요?

수제자로 보이는 젊은 무녀에게 물었다. 빨간 치마에 한라봉 금빛 저고리를 덧대어 입은 어린 얼굴의 그녀가 느릿느릿, 보통사람보다 다섯 배는 느린 말투로 대답한다.


열 그릇 넘을 텐데….

오늘은 제주에 계신 신들

모두 모시는 자리라 그래요.


춘경굿 배우시는 분인가 봐요?

(수줍게 웃으며 한참 뒤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네.

어쩐지 신비롭게 느껴질 정도로 묘한 대화였다. 웬걸. 갑자기 무대 밖으로 눈처럼 하얀 광목을 펼치더니 길게 길을 하나 낸다. 입구에서 찬찬히 버선발로 앙금앙금 처자 하나가 들어오는데 방금 대화를 나눈 그 젊은 무녀다.


하늘 문이 열려 여기까지 왔수다. 나 자청비우다.

아이고 자청비 오셨수다게.

자청비. 물질하는 자손, 농사짓는 자손, 발품 팔아 장사하는 자손. 모두 가릴것 없이 제주의 모든 일하는 자손들 보살핀다는 풍농의 제주 여신이다. 큰무당 곁에 앉아 도란도란 근황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문득 허리춤에 맨 망태

기 하나를 끄집어낸다.


자청비님 뭘 이리 가져왔수까?

잘 물어봤수다.

이거이 보리영, 깨영, 콩이영, 골고루 전복까징.

한 줌 한 줌 정성스레 큰 무당 손으로 건네진다. 시원하게 징이 울리더니 악사들 모두 일제히 풍악을 울린다.


아이고 감사합졍. 한데 나와 춤춥서

쑥스러워 멀쭉이 서서 쭈뼛거리는 자청비를 소무들이 잡아 이끈다.


춤춥서, 한데 춤춥서.

살랑살랑 고개를 새초롬하게 숙인 자청비가 어깨춤을 추기 시작한다. 매섭게 불던 바람이 봄을 몰고 당도하신 여신님의 고운 낌새를 알아차리고 차분하게 잦아들기 시작한다. 발꿈치를 앞꿈치 뒤꿈치 찍어누르며 모두들 더불어 놀

기 시작한다. 왈왈 구경하던 개들도 신명을 알고 짖어댄다. 자청비 곁에선 소무가 제상에 올려놓은 떡 한 덩어리를 떼어다 객석에 앉은 할망들에게 나눠준다. 쿵덕쿵덕 장단에 맞춰 떡을 씹는 할망들의 턱이 와그덩와그덩 위아래로

신나게 방아를 찧는다.


아이고 난 추워서 못보겠졍. 갈꾸당. 보고 옵서.

바람도 이제 안부는데마씨. 마져보고 갑졍.

할망들 곁에 앉아 쉬지 않고 펜을 굴리며 제주 무당 입 쫓아 필사하던 만학의 아재가 문득 벌떡 일어서더니 편의점으로 들어간다. 나오는 손에는 큼지막한 검은 봉투가 들려있다. 봉투 속에서 김이 모락모락 난다. 뜨끈한 병 두유

와 더운물에 데운 뜨끈한 캔 커피 한 짝이다. 할망들 언 손 녹이라고 한 병씩 쥐여준다.


아고 따숩구나. 아재도 따 잡숩서.

손이 얼어 캔을 못 따는 할망들을 일일이 찾아 하나씩 다 따준다. 자청비님! 찾으시던 자청비 서방

문도령 여그 계시낸. 

따뜻해져 오는 할망들 얼굴들. 봄이 여기도 왔구나, 싶다. 자리 옮겨 굿판 중앙 가까이 다가간다. 마당에 퍼질러 앉은 소무가 한삼을 쭉쭉 찢는다. 찢어지는 모양을 보고 올해 운세를 점친단다.


바당 괴기덜 갠찮을꺼.

제주 해녀들, 두세 마을 갱허고 일곱 마을은 섭섭핸

동서남북, 경상남도 강원도 전라도, 팔도 전부 훑어가며 올해 운수를 낸다. 쫙쫙 찢는 모양새가 시원스럽기도 하다가 어쩔 땐 힘에 부치는지 멈칫거리기도 한다.

민예총 사장님도 봅져. 하이고, 답이 안 나옴쪄.

한 차례 더 찢는다.

에? 답이 자꾸 안 나옵졍쪙

한 번 더 쭈우욱 길게 찢어낸다.


아하, 올해넌 대가리가 좀 아픔쪄.

웃대가리가 좋은 대가리가 되야마낸.

서로 의지가 있으남 잘 되연. 길도 트일 꺼라.

추운 날씨에 입춘 맞는 굿 구경하느라 추위 다 맞아낸 할망들 점괘도 한 사람씩 차례로 봐준다. 이렇게 끝인가 싶을 즈음에 입을 한차례 쩍 다시고 한마디 더 덧붙인다.


이거, 강정모을 해군기지도 봐줍서. 올해 좀 웃을 일 있어야마씨.

50년 이상 한 맺힌 일이라 어렵다수께.

나도 모르게 고개를 획 돌려 팸플릿 어쩌고 트집 잡던 두 시간 전의 그 아재를 찾는다. 눈에 띄게 멀끔한 차림이라 단번에 찾을 법도 한데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이제사 봄이 다 왔는데 봄 오는 소식 다 듣지도 않고 깡깡 얼어붙은 겨울 마음 그대로 지고 돌아갔구나. 안타까운 마음 한숨 한 차례로 대신하고 발아래 숨겨두었던 강정 팸플릿을 다시 꺼내든다. 한해 운수를 모두 정리하고 한바탕 놀자판이 된 무대 위로 할망들 몇몇이 올라 덩실덩실 봄맞이 춤을 춘다. 자청비 새색시 몸짓 못지 않은 어깨춤으로 회춘(回春)을 알린다. 제주 문턱 관덕정 앞마당에 정말 봄이 왔구나. 아직은 겨울인 시끄러운 윗동네 아랫동네 곳곳도 큰 걱정할 것 없다. 먼 하늘길 건너 내려오신 자청비님 단지 무릎이 아파 잠깐 제주 앞마당 길목에서 쉬멍놀멍 계시니. 보리며 쌀이며 전복이며 망태기에 짊어매고 다시 봄 전하러 떠나신단다. 여기 다음으로 행차하실 곳은 마을 길목에 건장한 바위 하나 솟아오른 곳이라 하신디, 그 바위 이름이 구럼비라나 뭐라나.

갱허난, 이녁들 가심소곱에도 혼저 봄바람 맞읍서예. (당신의 마음속에도 얼른 봄바람 깃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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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