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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41호(2012.12)

[사이사이 사람 사이]스타일의 독고다이

스타일의 독고다이




글 윤지영

그림 이희은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스타일의 독고다이 


얼마 전 학교 주차장에 아주 오래된 남색 프라이드가 세워져 있는 것을 봤다. 기억하는가. 80년대 말에 등장하여 최초의 국민차로 각광받았던 소형차 말이다. 주인이 차를 잘 관리하는 지 낡기는 했지만 흠집 하나 없어보였다. 반가웠다. 내 생애 첫 차도 바로 그 프라이드였기 때문이다. 92년도 식 하얀 색 프라이드. 2008년도 봄에 지인에게 공짜로 넘겨받은 프라이드는 창문을 수동으로 조절해야 하고, 에어컨이 안 되고, 시속 100km 이상으로 달리면 빌빌거린다는 점만 빼고는 20년이 다 되어가는 차 치고는 꽤 멀쩡한 편이었다. 특히, 음악을 좋아하는 전 주인 덕에 사운드 하나는 빵빵했다. 창문을 열어놓고 음악을 크게 들으며 서울 시내를 한 석 달 신나게 탔는데 그해 여름 동의대학교로 오게 되었다. 


부산으로 오면서 그 차를 갖고 올 것인가 말 것인가를 한참 고민했다. 아무래도 낯선 지역이니 차가 있으면 좋을 것 같긴 한데, 새 차를 뽑을 여건은 안 되었다. 7년여의 강사 생활 동안 월세 내고, 밥 먹고, 차비하고, 책 몇 권을 사고, 그리고 강사료 한 푼 없이 방학을 견뎌야 했으니 모아둔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프라이드를 갖고 오려니 마음에 걸리는 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그걸 어떻게 부산까지 몰고 오느냐 하는 거였다. 한 번도 고속도로를 타 본 적이 없는 초보나 다름없었다. 엄두가 안 나는 일이었다. 주변에서도 말이 많았다. 결혼도 안 한 여교수가 몰기에는, 왜 여기에 결혼도 안 했다는 단서가 붙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폼이 안 난다는 거였다. 게다가 부산은 험한 동네라 그런 고물차를 몰고 다니면 사람들이 무시할 거라고 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프라이드를 포기했다. 그리고는 정규직의 최고 메리트인 신용보증으로 새 차를 구입했다. 


지금 다시 프라이드를 보니, 못 몰고 다닐 것도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멋진가. 다들 타고 다니는 흔하디흔한 그런 차가 아니라는 게. 그런 희소성은 그 자체로 그만의 가치와 스타일을 말해주는 것 아닌가. 부산까지 오는 거야, 운전 잘하는 친구에게 부산에서 회 사준다고 꼬셔서 함께 왔을 수도 있다. 이제와 고백컨대, 그 사운드 빵빵한 내 첫 차를 포기한 이유는 남들의 시선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여자와 교수라는, 그러나 여전히 결혼도 안 했다는 단서는 잘 납득이 안 가지만, 여하튼 사회적 지위와 체면 때문에 내 스타일을 포기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오래된 물건들을 좋아한다. 새로운 유행을 선도하기보다는 익숙한 것, 내 취향에 맞아 내가 골라 오랜 시간에 걸쳐 내 몸에 맞게 익숙해진 것들이 좋다. 별 이상이 없는 한 그런 물건들을 계속 사용한다. 알뜰하거나 검소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걸 나름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스타일의 독고다이를 추구하는 편이랄까. 


그런데, 갈수록 스타일의 독고다이로 사는 게 자신이 없어진다. 처음 그런 조짐을 느꼈던 것은 대학 때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음악에 심취했던 나는 회화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워크맨 하나를 장만했다. 재생, 멈춤만 되는 저렴한 기종이었다. 하지만 그 워크맨이 생긴 후로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전영혁의 음악세계> 같은, 주로 팝과 세계음악들 프로를 섭렵하며 나만의 음악 테이프를 만들어 그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고 다녔다. 얼마나 행복하던지. 대학을 가서도 한동안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 지하철에서 아무도 테이프를 꺼내서 앞뒷면을 바꿔 끼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들 버튼 하나로 앞뒷면이 바뀌는 오토리버스 기종이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소심하게도 가방 안에 손을 넣고 테이프를 바꿔 끼었다. CD라는 게 나온 후에도 한참을 그랬다. 


CD 플레이어를 살 돈도 없었지만, 내가 듣던 카세트 테이프를 CD로 다 바꿀 돈은 더욱 없었다. 게다가 그토록 저렴한 워크맨이 어찌나 튼튼한 지 도무지 고장도 나지 않는 게 아닌가. 그러나 오토리버스 사건 이후 나는 예전처럼 당당하게 워크맨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이었다. 


그와 비슷한 일이 그 시기에 또 있었다. 시장통 가방가게에서 내 필요에 맞는 가방을 장만하여 한참을 잘 들고 다녔는데, 그게 명품 짝퉁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능력이 안 되는데도 명품을 갖고 싶은 사람으로 보이는 게 싫었다. 다른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셈이다. 


적어도 소비에 있어서는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아니라 아는 만큼 불안하다. 아는 만큼 보이니 자꾸 주변을 의식하게 된다. 어떤 복장에는 어떤 구두가 어울리고, 어떤 자켓에는 어떤 셔츠를 입어야 하고, 어떤 복장에는 어떤 가방을 들어야 한다는 등등, 소위 말하는 패션의 정석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나는 내가 좋아하는 대로, 내가 편한 대로 하고 다닐 수가 없다. 정규직이 된 덕에 향상된 경제력은 나에게 자유를 안겨주기는커녕 속박만 가져다 준다. 소비가 미덕인 사회에서 소비를 촉진시키기 위한 각종 마케팅 전략 앞에서 흔들리며 나는 나만의 스타일을 점점 잃어간다. 


사회적 지위에 맞게 요구되는 사회적 관습이라는 것도 무시 못 할 일이다. 여전히 보수적인 이쪽 계통에서 그나마 매일 정장을 입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인문학을 한다는 끝없는 자기 암시 덕분이다. 아니, 유치하게도 정신의 자유, 스타일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인문 정신이라고 주문을 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소비와 자본의 광풍이 몰아치는 이런 시대에 스타일의 독고다이는 영웅과 같은 용기를 필요로 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