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지게 한판]무정세월 여류하여 인생을 늙히는구나
세상의 모든 할매들 전상서
글 : 조혜지 esc2277@naver.com
사진 : 이장수 leeseeda@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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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야류>-동래읍성문화축제/ 북촌동 고분군 일대
“흥, 저 쌍놈이 터진 입이라고 말하는 뽄새 좀 봐라. 니가 인간새끼가?”
“얼씨구, 야야, 저년이 니 밥이라도 올케 지어줄 줄 아나? 조강지처 버린 놈치고 빤디 잘 사는 놈 못봤데이.”
시골집을 떠나 부산에서 자취하면서, 집밥이 문득 그리울 때면 연산동 외갓집에서 며칠이고 무전 하숙을 했다. 출발 10분 전, “할매, 내 오늘 외갓집 간데이.”라는 전화 한통이면 할매 손맛 듬뿍 적신 나물반찬이며 달큰한 김치찌개가 도착과 동시에 한상 가득 차려졌다. 밥 값 대신 내가 할매한테 해 줄 수 있는 일은 단지 말동무 노릇이나 하며 할매의 적적함을 덜어주는 것뿐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하나를 꼽자면 바로 막장드라마 같이 보기가 있다. 할매가 즐겨보는 막장드라마의 스토리라인은 배역 이름만 다를 뿐 기승전결이 모두 비슷했다.
[조강지처와 남편이 살고있다-한 젊은 여자가 나타난다-남편과 그 여자가 바람을 피다 들킨다. 뻔뻔하게 남편은 이혼을 요구한다-이혼 후 조강지처는 커리어우먼으로 성공하고 두 년놈은 비극을 맞는다.]
할매가 가장 좋아했던 부분은 이상하게도 남편이 악랄하게 조강지처를 괴롭히는 장면이었다. 마치 그 남자 배우가 할매의 면전에 있는 양 온갖 욕을 퍼부어댔다. 목소리는 어찌나 크고 분에 차 있는지 앞집 사람이 들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영감 : 할맘 할맘 내 말을 들어보게. 내가 할맘을 찾을랴고 인천 제물포까지 갔다가 거기서 작은 마누라 하나를 얻었네 (할미는 영감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영감은 장고장단에 춤추며 제대각시를 데리러 간다. 할미도 덩달아 엉덩춤으로 따른다)
영감 : (멀리 대고) 제대각시! 제대각시!
영감이 새각시를 할미에게 소개한다. 노란 비단 저고리에 싱그러운 다홍의 치마를 갖춰입은 각시가 할미를 약올리는 듯 요망시럽게 몸을 흔들며 걸어 나온다.
허, 니 서방 쩌기 있네.
하이고, 우짜꼬나.
마당을 빙- 둘러싼 관중들 틈에서 연신 추임새가 터져 나온다. 며느리가 사 준 선캡을 치켜 올리고 무대를 쏘아본다. 한 할매는 신나게 잡숫던 번데기도 옆에 제쳐두고 마당에 눈길을 떼지 못한다.
할미 : (구경꾼을 향해) 아이고, 여보소. 저 인물이 내보다 잘났나? 내가 더 잘났지!
클클, 그래도 젊은 각시가 이쁘제.
웃는 낯인데 어쩐지 측은하다. 집에 빨리 가자는 손주놈이 옆에서 칭얼댄다.
할무이 이것만 보고 가자. 집에 빨리 가가 뭐할래? 엄마도 없는데.
영감 : 런데 할맘 내 갈 적에 아들 삼형제를 두고 갔는데, 큰 놈 내 솔방구는 어쨌노?
할미 : 떨어져 죽었다.
영감: 뭐 떨어져 죽었다? 그래 둘짼 놈 내 돌멩이는 어짼노?
할미 : 던져서 죽었다.
영감 : 뭐 던져서 죽었다? 그래 세짼 놈 내 딱개비는 어짼노?
할미 : 민태서 죽었다.
영감 : 뭐 민태서 죽었다? 그래 자식 셋을 다 죽였다 말이지 휴-
(구경꾼을 향하여) 이 사람들아 다들 보소. 이년이 아이 셋 있는 것을 죽여버리고, 또 내 소실 하나 얻은 것까지 심술을 부리니 내가 어떻게 살겠나, 못살지 못살아. (할미에게) 에이 이년, 죽어라 죽어. (발로 찬다)
팔도유람을 떠났는지, 술에 절어 어디 산골짝에서 객사했는지 행방이 묘연한 영감을 찾느라 자식 돌보는 일에 소홀했던 할미, 겨우 다시 만난 영감에게 맞아죽는다. 비극적인 결말을 지켜보는 할매들의 반응이 희한하다. 박장대소도 이런 박장대소가 없다.
클클클 백날 디비바라, 안 일어나제.
니 마누라 뒤지삤다!
봐라, 죽었다이가. 다 니 탓이다. 조강지처 버리고 놀아난 니 탓. 후회하는 영감을 보며 할매들이 일제히 통쾌하게 웃어재낀다.
영감 : (넘어진 할미의 거동이 수상해서) 어응, 아이고! 이 일을 어야노, 할맘! 할맘!
조강지처를 버리고 젊은 새 마누라와 살던 만년 과장 전남편은 상대기업 신입사원으로 취직한 전처를 비웃는다. 그러나 전처는 아줌마 특유의 기획력으로 회사에서 승승장구 하고, 경쟁사인 남편의 회사를 나락으로 몬다. 뒤늦게 후회하는 전남편이 조강지처를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 할매는 이 대목에서 가장 분노한다. “흥, 지랄이라고 다시 붙잡나. 남 주기는 아까운가보네?” 화에 받힌 감정은 추스러지지 않고, 기어이 눈물까지 맺히고만다. 그때쯤되면 나도 참지 못하고 나선다. “할매, 할매 일도 아닌데 머할라꼬 화내는데. 다 거짓부렁 드라마 이야기다! ” 그러자 할매가 딱 한 마디 한다. “몰라, 나도 모르게 화가 받히는 걸 우짜노.”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이 할매의 화의 최종 근원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에 있다고 했다. 좋게 말하면 애주가, 리얼하게 말하면 일주일의 절반을 고주망태로 살아오신 우리 외할아버지. 여자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천상 한량이셨다. 그런 할아버지는 남들에게는 술친구하기 좋은 사람, 인간성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으로 통했지만, 할머니에겐 평생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원망과 분노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었다. 148센티의 작은 키로 유리공장을 하는 할배를 도와 남자도 하기 힘든 일을 30년 가까이 견뎌냈다. 마흔셋에 유리 절단기에 잃어버린 왼손 네 번째 손가락 한마디의 빈자리엔 그 지겹고 한스러운 나날들이 대신 응축되어있다. 할매는 평생 할배의 일꾼이었고, 동네북이었고, 술주정을 통한 해장의 표적이었던 셈이다.
자수가 취미였던 경주 최씨 문중의 막내딸 최송자.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만나게 해준 모든 이들을 원망한다. 하늘이 내린 궁합이라고 사주단자를 써준 동네 무당과, 술판에서 막내딸을 ‘치워버리기로’ 약속한 할매의 아버지, 비오기 전에 가자고 하루 일찍 나서기를 재촉했던 신행 가마꾼들.
이 세상 올 적에는 백년이나 살자더니 먹고 진 건 못다먹고, 어린 자손 사랑하며 천추만세 지내려고 했더니 무정세월 여류하여 인생을 늙히는구나
배꼽을 잡고 눈물을 질끔질끔 훔치던 할매들이 상도소리가 나오자 일순간 잠잠해졌다. 옆에 앉은 손주놈들도 진지해진 분위기를 느꼈는지 잠자코 할매의 표정만 살핀다. 평생 고생만 시키더니 늙어서야 “고맙소,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오.” 하고 무겁게 마음에 추하나 매달고 떠난 영감. 효도랍시고 이것저것 돈쓰는 자식들. 쭈글쭈글, 수십년 찡그리고 살아온 낯은 그대로 굳어져 웃어도 울어도 매한가지의 표정들이었다. 모든 놀음이 끝난 마당이 일순간 텅 비었다. 모든 막이 내리고 할매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너달을 할매에게 시달린 한 편의 막장드라마가 드디어 막을 내렸을 때, 할매는 티비를 끄고 부엌으로 나가며 말했다. “후, 이제사 끝났삤네.” 제발, 제발. 언젠간 꼭 끝나기를. 부디 세월을 타고 조금은, 그 막장의 기억들이 옅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