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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39호(2012.08)

[손바닥소설]주인공에서 짤려도 늠름한 이병욱 씨를 보라

[손바닥소설]   글 : 배길남 rakesku@hanmail.net   일러스트 : 유미선 blog.naver.com/qqwe80

 

주인공에서 짤려도 늠름한 이병욱 씨를 보라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거, 인자 일어나소! 여기 종점입니다.”

기사의 목소리가 버스 안을 울렸다. 버스 안 좌석에는 세 명이 아직 승객이란 단어로 포장되어 좌석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맨 앞에 앉아 있던 승객이 화들짝 놀라며 앞문으로 뛰어내려 ‘승객’을 벗어 던졌다. 맨 뒷자리의 승객이 기사의 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 있게 기지개를 켜고는 천천히 ‘승객’의 신분을 탈출했다. 문제는 출구 옆 좌석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승객이었다. 그 사나이는 서른과 마흔 사이의 나이로 보이는 외양을 가졌고 머리칼은 정리되지 않아 이리저리 꼬였으며 술을 제법 마셨는지 알코올의 향기를 흠뻑 품고 있었다.

“거, 일어나라니까? 여기 종점이요!”

기사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화해도 사나이는 여전히 4분의 2박자에 맞춰 코를 골아댈 뿐이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기사가 쿵쿵대며 사나이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거, 일어나라….”

그때 눈을 번쩍 뜬 사나이가 다가오는 기사의 손을 제지했다.

 

“거…, 참! 다음부턴 ‘거’를 빼고 승객을 깨워주시오. 거란 글자엔 있을 거(居)와 갈 거(去)의 의미가 상존한다오.”

서른에서 마흔, 텁수룩 수염, 알코올 향기의 사나이는 그렇게 말하고 승객의 위치에서 행인의 위치로 신분을 이동시켰다. 그는 행인으로 변신한 후 제일 먼저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장마에도 불구하고 밝은 달이 휘영청 떠 구름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 소리는 아주 작은 듯했지만 또박또박 확실하게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영화로 치면 카메라를 줌인 하듯 가까이에서 그가 뭐라 하는지 들어보도록 하자.

“나…, 이병욱이야.”

이병욱이라…. 지금 이 엽편 소설의 제목에 이병욱이란 이름이 나와 있겠지만 사실 생소하신 독자분이 대다수일 터. 그는 그런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며 뭔가를 말하려 하는 것이다. 그는 잠시 비틀거리다 똑바로 서서 버스 종점에 세워진 버스들을 훑어보고 시계를 보았다. 오후 11시 2분. 정말 애매한 시간이다. 버스가 끊겼을 수도 있고 안 끊겼을 수도 있는 문제의 시간이다. 아, 잠깐. 그가 다시 우리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나, 이병욱이라고. 거의 다 날 모르겠지? 그래도 나, 민예총 잡지 <함께 가는 예술인>에 유일한 소설 주인공 출신이야. 그래도 몰라? 훗! 그렇겠지. 내 얘기를 쓰는 소설가 이름도 잘 모를 텐데…. 큭큭큭!”

아, 잠깐, 잠깐. 이건 정말 또다시 영화로 빗대자면 심각한 NG 상황이다. 하지만 소설가든 서술자든 간에 캐릭터가 미쳐서 발광하는 것은 말릴 수 없는 노릇이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고 그의 말을 계속 들어 보도록 하자.

“배길라미 지가 소설을 지대로 못 써놓고는 주인공 핑계를 대고 날 짜를려고 해? 뭐, 컨셉을 바꿔? 웃기고 있네. 나 진짜 인생 종점 상황이야. 봐봐, 버스도 벌써 끊겼어. 썅! @#$%~~”

여기서 그만! 일단 독자 여러분께 정말 죄송하단 말씀을 드린다. 이병욱 씨가 오늘 무척 흥분한 것 같으니 잠시 기다리도록 하자. 10분 뒤, 한참 고함을 지르던 이병욱 씨가 고개를 숙이며 울먹거렸다.

“나, 첫 출연부터 ‘싸가지 없게’ 명함 하나 건지려 최선을 다했고, 작년 정전 사고 났을 때도 ‘좌빨스럽게’ 서민의 목소리를 대변했다고. 한삐라당이 새삐리당 됐을 때도 ‘가가가가’ 해대며 나름 풍자맨으로 달렸고, 페이스북 ‘좋아요’ 한 번 구현하려고 여자한테 채여도 봤어. 내가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안 짤리냐고? 이놈의 비정규직 주인공 신세…. 흑흑흑!”

한참 울던 이병욱 씨가 고개를 숙이며 허덕이고 있는데 아까의 버스 기사가 다가와 손수건을 건넸다.

“내 역할은 다 끝났지만서도 한 마디 할라고 다시 나왔소. 사실 종점도 수많은 정거장(停車場) 중의 하나 아니겠는교? 실망하지 마소. 근처엔 12시까지 댕기는 지하철역도 있고, 심야 버스도 댕기요. 또 튼튼한 두 다리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요?”

이병욱 씨가 고개를 들어 기사를 바라보았다.

“이만 하면 됐다인교? 배 소설가도 꽉 찬 나이에 전업 작가 한다고 돈도 못 벌고 개고생하지만…, 그래도 첫 승객처럼 쪽팔려 하지도 않고 둘째 승객처럼 얼굴에 철판도 안 깔고 당신처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인교? 그라이까 소설가 탓 말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보소! 소설가 뿐만 아이라 열심히 싸우는 예술인들 다아 잘 될기라.”

기사가 사라졌고 고개 숙이고 있던 이병욱 씨가 일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가 어디로 걸어가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우린 그의 중얼거림을 또 한 번 들을 수 있다. 굳이 영화기법 안 쓰고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말이다. 작고 낮지만, 또박또박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TO BE CONTINUED…. 다음 호에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