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긁적긁적, 독립영화 뒤통수 긁어보기]

작은 편집장: 임태환(xlros0000@naver.com) 사진: 김덕원(kkedoc@naver.com)

 

배병건 감독의 ‘숨비소리’ 

땅도, 바다도, 사람도 귀소본능이 있다.

                                     

 

배병건 감독의 ‘숨비소리’는 해녀였던 할머니가 자신의 심적 고향을 찾아가는 로드 무비다. 지금 할머니는 건조한 도심 속에서 살고 있다. 한때 바닷속에서 은빛 갈치처럼 유연했던 할머니, 이제는 도시의 딱딱한 바위가 되어 우두커니 뿌리 박혀있다. 다시 가야 한다. 어디로? ‘숨비소리’는 바로 그 목적지를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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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비소리/ 박제영

 

좀녀할망이 바다를 숨비네
살라가둘라 메치카불라
바닷속 칠흑의 바닥에서 밭을 일구네
살라가둘라 메치카불라
좀망사리 가득 해삼을 담으면 참았던 숨이 목젖까지 차오르네
살라가둘라 메치카불라
죽음의 문턱에서 내쉬는 늙은 흑고래의 휘파람소리
비비디바비디 부 비비디바비디 부
한 숨 돌리고 다시 죽음 같은 삶으로 귀환하는 좀녀할망의 숨비소리
비비디바비디 부 비비디바비디 부
사는 일이란 생각대로 되진 않는 것이어서
십 년이 이십 년이 되고 사십 년이 되고
칠십 평생 바다를 숨비고서야 겨우 한 생을 건너기도 한다네
살라가둘라 메치카불라 비비디바비디 부
아브라카다브라 케세라세라 비비디바비디 부
『문예연구』, 2009년 겨울호 중

 

 

버스 정류장
정류장에는 나밖에 없다. “여기가 맞나?” 갑자기 불안해진다. 5분 뒤, 36번 버스가 왔다. 버스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낀 아저씨가 나를 본다. “이 버스 기장가요?” 아저씨는 “예? 뭐라고요?”라고 되묻는다. “기장 가냐고요?” 나는 다시 공손하게 물었다. 그러자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인다. 기장! 부산 사람인 나에게도 왠지 낯설다. 아니, 해운대나 광안리가 아닌 바다는 전부 낯설다. 바다도시에 살지만, 바다보다 도시에 익숙하다. 만약 내 심적 고향을 찾는 로드무비를 찍는다면 울창한 빌딩 숲으로 갈 것이다.

 

 

기장 도서관 앞
“와~ 더럽게 덥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후덥지근한 기운이 밀려온다. 자외선 차단제를 바른 얼굴에서 허연 국물이 뚝뚝 떨어진다. 영화 속 할머니 피부는 참 하얗고 고았는데 나는 도대체 뭔가?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니, 갓 스무 살을 넘은 듯한 상큼한 여자가 홀로 서 있다. 발목 위까지 오는 초록 치마에, 흰색 티셔츠, 그리고 그 위에는 진한 살구색 남방을 걸치고 있다. 저 여자도 버스를 기다리는 걸까? 드디어 기다리던 버스 도착. 여자도 버스를 탄다. 아~ 버스 안이 참 시원하구나.

 

일광 해수욕장 들어가는 길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버스에서 내리자 바로 눈앞에 구멍가게가 있다. 더위를 사냥해준다는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며 모퉁이를 돌아 조금만 더 가니 또 하나 슈퍼가 보인다. 그 슈퍼의 유리에는 ‘아이스크림 50% 할인’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갑자기 더 더워진다. 
해수욕장 입구에 다다르니 사람들이 다리 밑에서 뭔가를 열심히 캐고 있었다. 나는 궁금해서 한 아저씨에게 물었다. “거기서 뭐 하고 계세요?” 그 남자가 못 듣자 다시 물었다. 그러자 나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다시 캔다. 옆에 있는 할머니도 묵묵히 캐기만 한다. 바다 안에 금이라도 숨겼나? 기장에 이렇게 해남 해녀들이 많을 줄이야. 뭔지 몰라도 오늘 저 아저씨네 저녁 밥상은 풍성할 것이다.
고개를 뒤로 돌리니 문학비가 서 있었다. 난계 오영수 선생을 기리는 문학비였다. 글을 읽어 보니, 오영수 선생은 1943년에 일광면에서 임시직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1953년에 「문예」지에 <갯마을>이라는 소설을 발표한 인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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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 실내 수영장 (낮)
수영장 물 속이다.
할머니가 허우적거리고 있다.
젊은 남자가 할머니를 물 밖으로 끌어낸다.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그러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몸을 돌려 일어나는 할머니.
남자는 황당해하며 자리를 뜬다.
그리고 나레이션. “나는 해녀였수다.”

 

 

 

#S2. 거실 (낮)
며느리가 토마토 주스와 돈 3만 원을 손에 쥐여주고 나간다.
거실 탁상에는 해녀시절 사진이 소라 액자 속에 담겨있다.
손자마저 집을 나가자 홀로 남게 된 할머니.
거실 창밖을 바라본다.

 

 

 

#S3. 경로당 (낮)
“제주도 할매, 밥 무러 안 갈끼가? 우리끼리 갔다 올게.”
창밖 햇살이 할머니 손바닥을 비춘다.
할머니는 햇살을 담으려는 듯, 손을 오므린다.
부글부글, 오므린 손안에는 할머니의 바다도 있다.
햇살을 따라 거품이 물 위로 오른다.
할머니는 물 위 마당에 있는 조개껍데기를 줍는다.   

 

 

 

 

일광 해수욕장 해변
해변에 온 김에 쪼리를 사러 갔다. 마침, 편의점에서 쪼리를 고르다가 버스 정류장 앞에서 만난 여자를 발견했다. 그 여자도 쪼리를 사서 신고 있었다. 붉게 까진 뒤꿈치, 신발 안에 모래가 들어가 뒤꿈치가 벗겨진 것이다. 그 여자는 곧 바닷물에 발을 담그며 해변을 거닐었고 나도 뒤따랐다. 모래알이 파도에 맞춰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아~ 시원해 참 좋구나.” 짭조름한 바다 냄새와 철썩철썩 파도 소리, 시원한 바닷물과 부드러운 모래알갱이들이 대위법을 이루며 나를 연주한다. ‘숨비소리’의 할머니처럼 첨벙첨벙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백사장은 많은 가족으로 붐볐다. 꼬마 아이들이 튜브를 타고 물장구를 치거나 모래성을 쌓으며 놀고 있었다. 나는 백사장에서 쪼그리고 앉아 정말 잘 만들어진 모래성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자 한 꼬마 여자가 와서 정색하며 나를 본다. 당황하여 나는 물었다. “이거 뭐야? ㅎㅎ” 꼬마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나를 노려본다. 아~ 오늘 참 덥구나.

 

이동 마을버스 정류장
해 질 녘에 이동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그런데 이곳은 영화의 배경이 된 정류장이 아니었다. 분명 영화 속 버스 정류장 뒤에는 아무런 집도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아닌데?” 집 대문 앞에서 마늘을 까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이동 버스 정류장이 여기 말고 다른 데 또 있습니까?” 그러자 한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여기 말고 저 짝으로 쭉 더 가면 한 개 더 있지.” 그래서 나는 다시 이동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웬일!! 아까 봤던 초록 치마 여자가 여기에 또 있는 게 아닌가?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녀의 발뒤꿈치에 붙여진 반창고. 어둑해진 버스 정류장에 홀로 서 있는 여자, 뭔가 오묘했다. 그곳에는 사람보다, 쌩쌩 달리는 자동차와 ‘고리원전 온배수로 35년 동안 피해를 보고 보상받지 못한 곳은 힘없는 기장어민뿐이다!’이라는 현수막만 나풀거리고 있었다. 낮부터 지금까지 함께하는 이 여자. 도대체 정체가 뭐지?   

 

183번 버스에서의 잡생각
어떤 영화 문구를 보니 이런 말이 있더라고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 사랑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곳도 누군가의 아름다운 고향이 아니었을까?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무시되지만, 누군가는 이곳에서 예쁜 추억을 남겼을 거라고. 해변에서 물장구치거나 모래성을 쌓던 꼬마처럼. 그 꼬마가 다시 왔을 때 그 추억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는 해변으로 남았으면 좋겠어. 제주도에 할머니는 가지 못했지만, 바다라는 마음의 고향을 찾아 위안을 얻었잖아. 버스 정류장에서 본 여자도 할머니처럼 자신의 고향을 찾아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겠지. 내가 찾아간 일광 해수욕장도 누군가에게는 그리움과 애틋함이 공존하는 곳일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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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4. 길 (낮)
분홍 보자기를 든 할머니.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다.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 낯선 지하철역, 복잡한 사거리 건널목, 수많은 도시 풍경들이 할머니를 지나쳐 간다.
할머니는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S5. 버스 정류장(낮)
조그마한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할머니.
마을버스가 도착하고 할머니는 설레는 표정으로 창 밖 풍경을 매만진다.

 

 

 

 

#S6. 해변 (낮)
모래사장을 밟고 선 할머니.
철썩철썩 파도 소리 들린다.
할머니는 무언가를 바라본다.
바다! 햇살은 잔잔한 파도에 부서진다.
할머니는 경로당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를 백사장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달려간다.
첨벙첨벙, 물속으로 사라지는 할머니.
경쾌한 숨비소리가 해변을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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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