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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피38은 어디에든 있다!!
글, 사진제공 : 김강(미술가, 미학 연구자) parasolhs@hanmail.net
1. 거리로 나온 예술가
거리를 지나다 보면 여러 풍경들을 마주하게 된다. 길을 지나는 사람,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 애인을 만나는 사람들, 전화를 하는 사람 등. 그러나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은 상점의 간판이나 광고 포스터들. 광고들은 저마다의 스펙터클로 우리의 시선을 붙잡으려 노력한다. 아니, 우리의 지갑이 열리는 시간을 기다린다. 대도시의 광고 홍수. 그 홍수 속에서 우연히 우리가 아무런 설명 없이 흰 종이위에 붉은 글씨로 써진 아큐파이(OCCUPY)라는 포스터를 만나게 된다면? 이건 뭐지? 뭘 광고하는 건가? 혹은 무슨 메시지인가? 잠깐 고민은 하겠지만 금세 잊히고 만다. 그렇게 잠깐, 잠깐 도시의 벽면에서 마주치는 작품을 제작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흔히 스트리트 아티스트라고 불리는 이들이 그들이다.
스트리트 아트는 공적으로 개방된 공간에서 야외전시, 거리 퍼포먼스, 해프닝, 포스터, 조각, 낙서, 벽화 등 개방된 공간에서 예술가들이 벌이는 행위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1930년대 멕시코의 벽화, 1970년대에 개념미술 작가들이나 플럭서스 그룹이 거리에서 행한 퍼포먼스, 거리의 게시판이나 전광판을 이용한 미디어아트, 1980년대의 그라피티 아트(낙서미술)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 후반 확산되기 시작한 공공 벽화 제작을 계기로 거리미술이 확고하게 정착되었는데, 당시의 과도기적인 정치사회 사상에서 비롯된 새로운 사회 환경 개선책으로 벽화 제작이 성행하였다. 도시의 게시판에 작품을 설치한 작가들로는 죠셉 코주스(Joseph Kosuth), 다니엘 뷔렝(Daniel Buren), 란 콜버슨(Lan Colverson), 데니스 마시(Denis Masi) 등이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2000년대 들어와서 거리에서 많은 그래피티나 그림 벽보 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스트리트 아트는 단순히 거리에 작품을 제작하거나 전시하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러한 행위 이면에는 정치적이고 행동적인 내용이 숨겨져 있다. 스트리트 아트의 첫 시작은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뒤였다. 생산주의 예술론을 지지한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는 ‘거리를 우리의 붓으로 만들자. 광장이 우리의 팔레트가 되게 하자’라는 구호로 거리미술을 시작했다. 예술작품을 갤러리나 공연장 등 닫힌 공간에 가둬두기 보다는 열린 공간에서 폭넓게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며,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기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 스트리트 아트이다. 즉 거리가 예술표현의 주요한 장소가 된 것은 러시아혁명이 그 계기가 된 것이다.
2. 풀통을 멘 예술가
베를린에 거주하는 프랑스 출신 예술가 에스뻬트렁트윗(에스피38, SP38). 그는 어디든 갔다. 어디에서든 풀통과 풀붓을 벽면에 발랐고, 어디에서든 전시했다. 그가 이동하는 거리 곳곳에는 그의 작품들이 전시된다. 거리의 빈 벽이 바로 그의 전시장이다. 서유럽의 베를린, 파리, 몽펠리에, 앙제, 브리스톨, 뷔르셀을 비롯해, 남미 칠레의 산티아고, 발파라이소, 북미 몬트리올. 아시아 거리에서도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버마의 양군, 필리핀의 마닐라, 한국의 서울, 안양, 부산. 아프리카에도 갔다.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 지구 반 바퀴는 돈 셈이고, 지구 반 바퀴에 속하는 도시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었고, 되고 있다.
벽보작업이다 보니, 그 위에 다른 광고 벽보가 덮이기도 하고, 비바람에 퇴색되기도 한다.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성을 지닌 예술작품이라는 아우라는 없다. 그저 한 시절,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사라질 뿐이다. 덧없음. 예술작품을 둘러싼 과도한 환호와 상품성, 예술성 등은 시간이 지나면서 너덜거리게 될 지도 모른다. 거리 빈 벽의 에스피38의 작품처럼.
에스피38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2004년, 국제퍼포먼스 콩그레 <웰컴 골드>라는 행사에 초대되어 처음 한국에 방문한 SP38은 2007년, 오아시스프로젝트와 워크숍을 진행했다. “주거하는 조각_스쾃 : 빈 벽을 공격하라” 프로젝트. 현재는 올덴버그의 조형작품이 들어선 청계천 들머리. 작품 설치를 위해 세워진 가벽은 공교롭게도 흰 벽으로 남아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빈 벽이라니. 그 빈 벽 위에 워크숍을 함께 했던 작가들과 에스피38의 작품이 부착되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난데없이 나타난 예술가들과 흰 벽에 전시된 작품들은 시민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우리는 서울 한복판에 어떤 ‘무질서’를 출현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창조의 혼돈이며 표현의 폭발이 될 것이다. 우리는 <풍경>에 예속된 벽들을 해방시킨다. 벽이여, 외쳐라!’. 후지이 다케시의 벽시. 모든 사람은 테러리스트(Everyone is terrorist)라는 에스피38의 텍스트 작품이 내걸리자 시민들은 그 앞에서 즐겁게 사진촬영을 했다.
예술행사나 워크숍이 없는 날에도 에스피38은 부지런히 풀통과 풀붓을 들고 한국의 거리로 나섰다. 홍대앞, 문래동, 종로 자신의 발길이 닫는 곳 어디에서나 빈 벽을 발견하고, 전시장으로 만들었다. 2012년에는 그동안의 거리 전시 작업을 한데 모은 아카이브 전시가 문래동 프로젝트 스페이스 랩39(LAB39)에서 열리기도 했다.
2013년 대선이 끝난 직후 에스피38은 한국에서 만난 지인들에게 메일을 보내왔다. 한국의 광고 포스터들 위에 부착된 그의 텍스트작업. 낫 해피 벗 뉴(Not Happy but New). 대선 직후의 한국 상황을 말해주는 듯하다. 물론 진정한 의미의 뉴(New)는 아니지만, 낫 해피(Not Happy)인 것만은 분명하니까.
‘누가 미떼를 죽였는가? 다시.’(Who kill mitte?, again)
95부터 베를린에 거주하는 에스피38은 베를린의 얼터너티브한 문화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30년 넘게 프랑스와 독일의 스쾃에서 활동해 왔던 그에게 베를린의 중심부 미떼(Mitte)의 변화는 신자유주의의 유럽 상륙을 증거한다. 독일 통일 이전에 동독 지역에 속해 있었던 미떼 지역은 서독으로 이주해간 사람들이 버리고 간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곳에 스쾃예술가, 자율주의자, 생태운동가 등 ‘다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내었고, 그 문화는 지역의 성격을 문화적으로 바꾸었다. 좀 더 다른 것을 보고자 하는 관광객들은 베를린의 미떼 지역을 찾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베를린 시정부는 베를린 스쾃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타클레스(Tacheles)를 공적자금으로 지원하기 시작했고, 부동산업자들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결국 타클레스는 몇 년 전에 스쾃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로 부동산업자에게 팔려나갔고, 미떼 지역의 월세는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그곳을 만들었던 이들은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가 없다. 과연 ‘누가 미떼를 죽였는가? 다시.’(Who kill mitte?, again) 이것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에스피38의 대답이다.
현재는 러시아 혁명기의 정치적 의미를 담은 스트리트 아트를 거리에서 많이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는 암호와 조악한 그림들이 대도시의 거리를 장악하고 있기에 때로는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또한 얼터너티브한 예술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면서 스트리트 아트는 새로운 예술의 장르로, B급 문화의 대표적인 문화상품이자 유행이 되었다. 내용이 빠진 형식의 유희만으로도 용인이 되는 것은 예술 그 자체가 가진 내적 모순일 것이다. 그러나 내용과 형식, 그 모두에 충실하려는 예술가들을 거리에서 마주할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어느 거리를 걷다가 <I don't wanna be your friend on Facebook. 나는 당신의 페이스북 친구가 되고 싶지 않다>는 벽보그림을 발견한다면? 그것이 누구의 작품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