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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기획, 상식의 파괴와 전복>
진보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는다
글 : 강명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hkmk@pusan.ac.kr
유득공(柳得恭, 1749-?)이라면 {발해고(渤海考)}의 저자로서 알 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그런 사람이다.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서파 출신이었기에 대단한 출세는 할 수 없었지만, 당대 최고급의 지식인이었다. 정조의 인정을 받아 규장각에서 검서관(檢書官)을 지내기도 하였다.
유득공이 살았던 18세기 후반 서울은 꽤나 음악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여기에는 다소 엉뚱한 이유도 있다고 한다. 재미삼아 써 본다. 반세기를 넘도록 왕위에 있었던 영조는 재위 기간 내내 금주령을 유지했다. 백성이 먹을 곡식도 부족한데, 무슨 술이냐는 말이었다. 민간의 잔치 특히 어버이의 수연(壽宴)에서 술을 쓸 수 없게 되자, 풍악을 호사스럽게 잡히는 것을 부모를 위한 효성의 표현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것이 음악에 대한 수요를 넓히고 음악을 즐기는 분위기를 조성했다고도 한다. 금주령과 음악의 발달이라, 좀 뜬금없지 않은가?
유득공도 도시의 음악적 분위기에 끌려서인지 악기를 배웠다. 해금이었다. 유득공과 어울리던 인물 중 서상수(徐常修)란 인물이 있었다. 서상수는 예술품에 관한 감식안이 높았고 또 엄청난 양의 골동품과 서화를 수장한 컬렉터이기도 하였다. 서상수는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 박지원 등 이른바 연암그룹과 주로 어울렸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서상수가 음악애호가로서 음악에 관한 깊은 이해가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유득공이 서상수 앞에서 자신이 배운 해금을 켰더니 거지의 깡깡이라면서 혹평을 하였다. 무안해하며 그 이유를 묻는 유득공에게 유우춘(柳遇春)과 호궁기(扈宮其) 같은 해금의 명인에게서 배우지 않고 어디서 거지의 깡깡이를 배웠느냐고 핀잔을 주는 것이었다. 유득공은 창피해 그날로 해금을 싸두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유득공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친척 금대거사(琴臺居士, 실명 미상)을 통해 유우춘과 만난다. 유우춘은 금대거사의 얼제(孼弟)였던 것이다. 금대거사의 아버지 유운경(柳雲卿)은 어떤 장군 집의 계집종을 좋아했다. 그 계집종과 유운경 사이에서 아들 둘이 났는데, 어머니가 계집종이니 두 아들의 신분은 종모법(從母法)에 의해 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금대거사는 어렵사리 돈을 마련해 두 아우를 속량(贖良)시킨다. 첫째는 망건장수가 되었고, 둘째는 용호영(龍虎營)의 군졸이 되어 해금의 명인으로 이름을 날린다. 그가 곧 유우춘이다.
유득공은 금대거사와 함께 유우춘을 찾아가 그의 해금 연주를 듣고 깊은 감동에 잠긴다. 그리고 자신의 해금을 꺼내어 유우춘에게 보이며 거지의 깡깡이란 혹평을 들었다면서 어떻게 하면 그 수준을 면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유우춘은 모기의 앵앵거리는 소리, 파리의 윙윙하는 소리, 장인들이 물건을 만드느라 내는 소리, 선비가 글 읽는 소리는 모두 밥을 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서 자신의 해금 역시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배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나의 해금도 저 거지의 해금과 재료는 꼭 같지요. 말총으로 활을 매고 송진으로 칠을 하여, 현악기도 관악기도 아니고 타는 것도 부는 것도 아니지요. 나는 해금을 배우기 시작하여 3년을 지나 다섯 손가락에 못이 박히자 연주법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기량이 나아갈수록 급료는 오르지 않았고, 사람들은 더욱더 몰라줍디다.
그런데 저 거지는 어쩌다 망가진 해금 하나를 얻어 겨우 몇 달 켜본 솜씨로 켜도 사람들이 겹겹이 담장을 이루며 듣고, 곡을 마치고 돌아갈 때면 따르는 사람이 수십 명이지요. 하루에 버는 곡식만 해도 한 말이고, 돈도 한 움큼이나 되지요. 딴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지요. 요즘 세상 유우춘의 해금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알아주는 바이지만, 그 이름만 듣고 알 뿐입니다. 나의 연주를 직접 듣고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어 유우춘은 자신의 연주를 직접 들은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종친과 대신 등 양반 엘리트들은 음악을 알고 감상하는 것처럼 굴지만 정작 연주를 들으면 졸음에 빠지고, 풍류를 좋아한다는 오입쟁이들 역시 급하고 빠른 연주만 좋아할 뿐이다. 어느 쪽도 예술적 깊이가 있는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 유우춘이 추구했던 예술의 경지는 대중들에게 전혀 이해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유우춘은 그래서 말한다. “예술적 기량이 진보할수록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는다.” 그의 말은 예술의 진보와 대중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찌른다.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을 고도로 발전시키면 시킬수록 대중과 멀어지게 된다. 반면 거지의 깡깡이는 사람을 불러 모으고 돈을 벌게 된다.
유우춘은 오직 호궁기와 어울려 해금을 켠다. 한쪽의 연주에 실수가 있으면 돈 한 푼을 내기로 하고 겨루며 하는 연주다. 이 연주가 자신의 마음에 가장 흡족한 연주라고 말한다.(서로 돈을 많이 잃어본 적은 없었다고 한다!) 유우춘은 자신을 알아주는 것은 호궁기 뿐이지만, 그 호궁기마저 자신의 예술적 기량을 완벽하게 알아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유우춘은 끝으로 유득공에게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곧 거지의 깡깡이)을 버리고 도무지 알아주지 않는 자신의 연주를 배우고자 하는 것은 딱한 일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예술은 이미 문법에 갇힌 것이다. 진정한 예술가라면 그 문법을 뛰어넘는다. 하지만 그 문법을 넘는 순간 대중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예술사의 새 지평을 열었던 사람들은 그 문법을 틀을 깨고 넘어섰던 사람들이다. 대중의 환호를 받고 그 환호에 기대어 돈을 벌어들이는 데 자기 예술의 목적을 두는 예술가는 예술가인가, 아닌가. 유득공은, 봉양하던 노모가 죽자 유우춘은 해금 연주를 그만두었고 자신을 찾아오지도 않았다고 전한다. 그는 “기술이 더욱 높아 갈수록 세상 사람들이 더욱 알아주지 못한다”고 한 유우춘의 말을 곱씹으며 그것은 해금에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 어디 예술만 그러랴, 학문도 기예(技藝)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