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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38호(2012.06)

[사이사이 사람사이]좋아요? 아니, 안 좋아요

[사이사이 사람사이]좋아요? 아니, 안 좋아요
글 : 윤지영 windnamu@hanmail.net ㅣ일러스트 : 이희은 eunilus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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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아니, 안 좋아요.

 

학부 2학년 아이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다. 강좌명은 ‘문장과 수사’이지만, 딱딱한 문장론 대신 ‘나를 찾는 글쓰기’라는 주제로 거의 매주 짧은 글을 쓰고, 함께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얼마 전에 다룬 주제는 ‘나의 이상적인 자아상’이었는데, 아이들이 제출한 과제는 흥미로웠다.
50명의 아이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열정적인 사람, 전문성을 갖춘 사람, 항상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 등등. 그러나 놀랍게도 80%의 아이들이 모두 하나의 모습을 꿈꾸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다가오기 쉬운 사람’, ‘인간관계가 원만한 사람’, ‘사교성이 좋은 사람’ 등, 각기 다른 말로 표현되었지만, 결국은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원만한 사람이 되기를 아이들은 바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 많은 아이들이 한 가지 이상적인 자아상을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 하필이면 왜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 아이들 말대로 어째서 다들 유재석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스무 살 아이들의 글은 나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과제를 나눠주고 나서 내가 했던 그 생각들을 말했을 때, 아이들은 ‘그게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가 가진 세 번째 의아함이다. 그러게, 나는 그게 뭐가 이상한 일일까. 그리고 아이들은 어째서 그게 이상하지 않은 걸까?
아이들에게 과제를 내주면서 나도 내 이상적 자아상이 뭔지 생각해 보았었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남들과 구별되는 나만의 개성을 갖춘 사람 말이다. 옷을 입어도, 말을 한 마디를 해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이 할 수 있고, ‘나’임을 알아볼 수 있는 ‘나’만의 고유성을 가져야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원만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아이들의 생각이 이상한 것도 당연하다. 아이들의 생각과 내 생각은 이토록 다르니.

 

하지만 말이다. 어떻게 80%의 아이들이 모두 똑같은 것을 꿈꾸는가는 여전히 의문이다.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다가가기 쉬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답은 세 가지로 모아졌다. 첫째, 항상 밝은 표정을 지을 것. 둘째, 웬만하면 다른 사람의 뜻을 따를 것. 셋째, 마구 퍼줄 것. 이건 완전히 밸도 없이 남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 하는 ‘웃고 있는 피에로’가 되자는 거 아닌가. 그러나 아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람이라는 거다. 아, 지독하게 눈물겨운 이타심의 발로여.
그러나, 자유로운 토론을 위해서는 ‘피에로’ 운운할 수는 없는 일. 하여, 아이들에게 또 물어보았다. 쉽지는 않겠지만, 만약에 이 세 가지 조건을 다 충족시켜서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게 되면 뭐가 좋을까. 아이들은 대답했다. 외롭지 않다, 심심하지 않다, 이미지가 좋아지고, 필요한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등등.

아! 그제서야 이해가 갔다. 이 아이들은 외롭구나. 스무 살이나 되었는데도 누군가 함께 하지 않으면 불안하구나. 스스로 즐겁고 혼자서도 잘 지내는 법을 모르는구나.
두루두루 인간관계를 잘 맺어놓으면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원만한 사람=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이타적인 사람>이라는 생각과 논리적으로 상충되는 것임을 지적하지 않았다. 두루두루 원만하게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끊임없이 신경 쓰며 그에 맞춰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재단하는 피곤한 삶이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유재석 같은 사람은 누구나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말도 참았다. 여러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꼭 그렇게 밸도 없는 꼭두각시처럼 사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이 아이들은 지금 두려운 거니까.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포기하는 걸 택하더라도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되는 일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공포스러우니까. 그리고 그 공포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만큼 원초적이고 뿌리 깊은 것일 테니까.

 

하긴, 그게 어디 이 아이들뿐인가. 우리는 얼마나 사교성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는가. 혼자라는 사실은 곧 비정상이라는 이상한 등식이 머리에 박혀 우리의 일상은 무리에 섞이기 위해 해야 하는 많은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싫어도 좋은 척, 관심 없어도 관심 있는 척, 사람들의 대화에서 소외될세라 최신 유행가를 챙겨듣고, 요즘 뜨는 동영상을 챙겨보고, 열심히 페이스북에 ‘좋아요’ 손가락도 치켜 세워준다. 하지만, 정작 단 둘이 있으면 서로에게 다가가는 일에 얼마나 서툰가. 대화를 하며 서로의 마음을 읽고,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며 친밀감을 쌓아가는 일은 평생의 숙제가 아니던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살피기에 앞서, 깊고 무거운 침묵 속에 홀로 자신과 만나는 일은 또 어떤가. 모두 함께 좋다고 외치는데도 저마다의 가슴에는 어찌 그렇게 스산한 바람이 부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