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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기/47호(2013.12)

[연간기획] 음악실험실_실험음악, 기성을 전복시키는 시도4 "완벽하게 음악이 승리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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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기획] 음악실험실_실험음악, 기성을 전복시키는 시도4

                                                           "완벽하게 음악이 승리하는 순간"

 

글 : 서정민갑(대중음악 의견가) bandobyul@hanmail.net

 

 

 

 

 

뒷세대가 앞세대를 밀어내듯 뒤에 나온 음악들이 먼저 나온 음악들을 밀어낸다. 먼저 나온 음악이 있었기에 장르의 양식과 스타일이 생겨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음악들이 과거의 전통을 끊임없이 바꾸지 않았다면 세상의 음악은 예나 지금이나 다 똑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많은 음악은 실험음악이며, 기성을 전복시키는 시도이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떤 음악은 과거에 영합하고 심지어 과거로 퇴행하기도 하지만, 어떤 음악은 과거와 단절하며, 어떤 음악은 과거에 기대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 미묘한 차이가 쌓이고 쌓이면서 계단 같은 변화들이 하나씩 만들어진다. 음악의 역사는 크고 작은 변화가 만들어냈고, 지금도 만들고 있는 계단의 연속이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대중음악의 변화 가운데 가장 뚜렷한 변화는 비트와 데시벨, 노이즈의 차이가 아닐까? 초기의 팝과 현재 일렉트로닉 음악의 비트 사이에 존재하는 비피엠(BPM, Beats Per Minute)의 차이는 얼마나 큰가. 과거 음악의 비트는 지금 들으면 지루할 정도다. 데시벨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 주인공 마이클 제이. 폭스가 일렉트릭 기타를 치다가 록킹한 연주를 선보였을 때 과거의 인물들이 황당해했던 장면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지금은 록 음악에서 흔히 구사하는 주법도 과거의 감각으로는 귀 아픈 소음으로만 들렸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록과 일렉트로닉 음악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노이즈 역시 처음에는 음악으로 들렸을 리 만무하다. 지금도 음악이 고상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이런 음악을 시끄러운 소리로만 여기지 않는가. 지금 인기를 끌고 있는 에프엑스의 노래를 100년 전에 들려주었다면 천둥번개 치는 소리 같다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음악의 역사는 음악이 될 수 있는 소리의 스펙트럼이 계속 확장된 역사였다. 지금 소수만이 열광하는 노이즈 음악이 나중에는 가장 팝에 가까운 음악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현재 가장 빠른 음악, 가장 시끄러운 음악, 가장 격렬한 음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귀를 강하게 자극하는 음악이 좋은 음악이라는 뜻이 아니다. 지금도 의도적으로 소리를 찌그러뜨리는 음악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음압을 조정해 의도적으로 강한 자극을 만들어냄으로써 오히려 소리의 미세한 차이를 놓치게 만들어버리는 음악들이 음악을 망치고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은 현실이다. 사실 비트와 데시벨, 노이즈의 사용은 음악적 완성도와 무관하다. 오히려 지금은 비트와 데시벨, 노이즈를 높여가는 음악보다 낮춰가는 음악들이 더 새롭게 느껴질 정도로 음악적 실험이 만연해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를 둘러싼 삶의 속도 자체가 과거의 비트와 데시벨, 노이즈를 사용해서는 설명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한 시간이면 서울에서 제주도로 훌쩍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과 손전화는 우리를 얼마나 빠르게 연결하여 주는가. 손전화에 연결된 스마트한 시스템은 서로 연락하고 자료를 주고받고 물건을 사고파는 등등의 행위를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할 수 있게 만들어버렸다. 그 속도를 비트로 표현한다면 어떤 비트로도 비견할 수 없을 것이다. 현대의 기계 문명이 만들어낸 소음의 데시벨 역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지경이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한 인간이 날마다 접하게 되는 정보의 양도 실로 엄청나지 않은가. 과거 평생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땅을 껴안고 살았을 절대다수의 인민을 지배한 속도와 고요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그러니 음악 역시 더 빨라지고 더 시끄러워질 수밖에. 현실이 이렇게 빠르고 시끄러워지는데도 음악이 느리고 조용하기를 바라는 것은 음악만이 농경사회의 전통, 그러니까 포크 음악의 흐름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가장 빠른 음악이라면 이디엠(EDM, Electronic Dance Music)을 찾아야 하고, 가장 시끄러운 음악이라면 노이즈 음악을 찾아야 하며, 가장 격렬한 음악이라면 헤비니스 음악을 찾아야 할까? 한국에서 좋은 이디엠 음악을 하는 디제이와 뮤지션이 이미 적지 않고, 대중적이지 않은 음악임에도 꾸준히 노이즈 음악을 하는 이들도 여럿이다. 인디 신을 중심으로 헤비메탈과 하드코어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 역시 많다. 이들이 대중음악의 형식을 보다 전위적으로 바꿔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음악 역시 인간의 감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자신이 느낀 것 없이 만들 수 있는 음악은 어디에도 없다. 감정적 동요에 대한 표현과 공감의 욕구가 바로 음악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 아니겠는가? 물론 이제는 그 욕구가 바로 상품으로 물화 되지만 말이다.

 

그래서 빠르고 시끄럽고 격렬한 음악 중에서도 마음을 흔드는 음악에 주목하게 된다. 형식적으로 아무리 인위적인 설정을 한다고 해도 음악이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냥 기술과 소리의 집합일 뿐이다. 극단으로 향해가는 소리의 방법론이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어서 박수를 받게 되는 음악은 모두 제각각이다. 그 중에서도 내게 특히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음악은 할로우 잰(Hollow Jan)이다. 하드코어와 포스트 록의 방법론에 기초한 밴드 할로우 잰의 음악은 자신이 기초하고 있는 음악의 특성대로 격렬하다. 보컬은 비명을 지르듯 격렬하고 기타와 드럼 역시 마구 긁어대고 두들겨댄다. 소리의 높이가 높고 간격이 촘촘하다고 할 수 있는 음악이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분명할 수밖에 없는 음악이다.

 

그러나 할로우 잰의 음악에는 분명 듣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다. 세상에 헤비니스 계열의 음악은 무수히 많고 그들의 음악 중에서 명곡도 많지만 할로우 잰의 음악만큼 마음을 압도해 들어오면서 아프게 하는 음악은 흔하지 않다. 승리자가 되지 못한 이들의 패배감과 상처가 은유적으로 새겨진 노랫말과 비감한 멜로디를 결합하며 폭발하는 할로우 잰 음악의 서사는 극적이면서도 한없이 인간적이다. 기술적 장치를 활용하지 않으면 만들어낼 수 없는 음악임에도 보컬과 연주자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소리 모두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매달린 현을 기어이 건드리고 만다. 그래서 이들의 음악을 들으면 인간이 감당할 수밖에 없는 슬픔과 외로움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삶이 아무리 즐겁고 행복하더라도 결국은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 혼자로는 어떤 운명도 세계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삶은 끝내 슬픔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할로우 잰의 음악만큼 처절하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음악은 드물다.

 

사실 할로우 잰의 음악은 이미 있는 록 음악의 어법을 그다지 많이 전복시키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할로우 잰의 음악은 확실히 우리가 잘 표현하지 않고 잘 드러내지 않았던 우리의 무의식 같은 절망과 슬픔을 적어도 그들의 음악과 함께 있는 순간에는 수시로 전복시키며 드러나게 한다. 의식으로 통제하고 부정하던 감정들은 할로우 잰의 음악이 흐르는 동안에는 금세 목울대를 넘어 우리를 휘감아 출렁이게 하고 만다. 그 순간 우리는 그 어떤 사회적 지위와 역할, 계급과 성별, 나이를 뛰어넘은 그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완벽하게 음악이 승리하는 순간, 그 순간을 일컬어 우리는 감동이라고 할 것이다.

 

음악의 역사는 이렇게 감동으로 흐르는 땀과 눈물방울들로 앞으로 나아간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다른가보다 얼마나 마음을 움직이는가이다. 다른 표현인 동시에 마음을 움직이는 표현일 때 음악은 비로소 음악으로서 새로움에 그치지 않는 힘을 획득하고 새로운 길이 된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표현할 또 다른 방법을 알게 되고 또 다른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수많은 사잇길로 만들어지는 음악의 지도.